우리 곁을 스쳐가는 소음에 관하여
오래전 일이다. 수원으로 이사를 계획하며 여러 집을 보러 다니던 시절이었다. 어느 날 15층에 위치한 한 아파트에 들어섰을 때, 나는 마음을 빼앗겼다.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마주한 깔끔한 인테리어와 거실 창 너머로 시원하게 펼쳐진 풍경은 그 자체로 완벽해 보였다. ‘여기서 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였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덜컹거리는 규칙적인 소음이 창을 넘어 고요했던 실내의 공기를 미세하게 흔들었다. 그 소리는 아주 작은 파동이었지만, 내 마음속에서는 거대한 경고음처럼 울렸다. 앞으로 태어날 아기의 평온한 잠과 일상을 상상하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나는 그토록 마음에 들었던 집을 뒤로하고 무거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그 집은 공간적으로는 완벽했지만, 소리라는 불청객이 이미 그곳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상도 그날의 집과 닮아 있다. 무언가에 온전히 몰입해야 하는 순간, 어김없이 방해꾼이 찾아온다. 집중이라는 견고한 성을 쌓으려 하면, 꼭 다른 생각들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다. 우리는 종종 그 유혹에 타협한다. ‘그래, 머리도 식힐 겸 쉬운 일부터 처리하자.’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본래 해야 할 중요한 일을 뒤로 미룬다. 하지만 막상 그 사소한 일들을 처리하고 다시 책상 앞에 앉으면, 또 다른 잡념들이 귓가에 속삭인다. 마치 끝도 없이 이어지는 릴레이 경주처럼 산만함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우리가 느끼는 스트레스의 본질은 과중한 업무량 그 자체가 아닐지도 모른다. 진정한 스트레스는 ‘해야 하는데 하지 못하고 있을 때’ 발생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몰입하여 그 일을 수행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리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일을 해야 한다는 중압감, 그리고 그 중압감을 피해 도망치는 과정에서 겪는 죄책감이 우리를 더 괴롭힌다.
산만함은 마치 내 옆을 스쳐 지나가는 기차와 같다. 그 기차는 ‘집중하지 못함’이라는 화물을 가득 싣고, 저 멀리서부터 무서운 속도로 우리에게 달려온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기차는 굉음을 내며 우리의 시선을 뺏고 사고의 흐름을 끊어 놓는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 우리는 집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하지만, 산만해지는 법은 배우지 않아도 기가 막히게 잘해낸다.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는 자연스럽게 산만해진다.
이 산만함이 커지면 그것은 단순한 방해 요소를 넘어 하나의 거대한 우주를 이룬다. 삶 자체가 산만함이 만든 우주 속에 갇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인공지능(AI)만이 환각(Hallucination)을 일으킨다고 생각한다.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내고, 엉뚱한 맥락을 연결하는 오류 말이다. 하지만 인간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꿈속에서, 그리고 깨어있는 현실의 산만함 속에서 끊임없이 환각을 경험한다. 해야 할 일을 외면한 채 잡념의 바다를 부유하는 시간, 그것은 실체가 없는 허상 속을 헤매는 환각의 시간과 다르지 않다.
그날 수원에서의 기억처럼, 산만함이라는 기차가 멀리서 들려올 때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멍하니 서 있을 것인가, 아니면 창문을 닫고 나만의 고요한 공간을 지켜낼 것인가. 태어날 아이를 위해 발걸음을 돌렸던 그때의 결정처럼, 우리에게는 소음을 차단하고 본질에 집중해야 할 용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