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커피 한 잔

오늘도 한 잔의 커피를 마시는 우리

by 고래 아저씨

숀 스테이먼의 저서 <커피연구소>를 읽고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나 또한 이공계 과학을 전공한 터라, 커피를 감성이 아닌 '분석'의 대상으로 바라본 시선이 반가웠기 때문이다. 작은 콩 하나가 향긋한 액체가 되기까지, 그 여정은 실로 거대한 화학 실험과도 같다. 우리는 매일 아침, 아주 복잡하고 우아한 과학 실험의 결과물을 마시는 셈이다. 알고 마시면 더 맛있는 법이니, 오늘은 커피의 과학적 비밀을 살짝 엿보려 한다.


아라비카와 로부스타, 출생의 비밀

커피 세계에도 엄연한 '계급'이 존재한다면 믿겠는가. 대표적인 커피 품종인 '코페아 아라비카(아라비카)'와 '코페아 카네포라(로부스타)' 이야기다. 카페에 가면 으레 "저희는 100% 아라비카 원두만 사용합니다"라는 문구를 보게 된다. 이는 아라비카가 로부스타보다 맛이 훨씬 뛰어나다는 방증이다. 섬세한 향미를 가진 아라비카에 비해 로부스타는 구수하다 못해 쓴맛이 강하다.

그렇다면 맛없는 로부스타는 왜 멸종하지 않았을까. 이름의 기원인 '로부스트(Robust, 튼튼한)'에서 알 수 있듯, 녀석은 생존력이 엄청나다. 병충해에 강하고 아무 데서나 잘 자라니 농부 입장에선 효자나 다름없다. 심지어 카페인 함량은 아라비카보다 2배 이상 높다. 야근이 잦은 현대인에게 로부스타 믹스커피가 사랑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충격적인 사실은 로부스타가 아라비카의 '부모'라는 점이다. 유전자 검사를 해보면 아라비카는 로부스타의 형질을 물려받은 자식뻘이다. 부모보다 자식이 더 세련되고 맛도 좋다니, 청출어람이 따로 없다. 하지만 척박한 환경에서 꿋꿋이 살아남은 로부스타의 자생력만큼은 인정해 줘야 한다. 어쩌면 우리네 아버지들이 쓴 소주를 들이키는 모습과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테루아, 커피의 고향을 말하다

와인 마실 때만 '테루아(Terroir)'를 따지는 게 아니다. 커피 역시 자라난 땅의 기운, 즉 테루아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는다. 고도와 위도는 커피의 풍미를 결정짓는 핵심 변수다. 콜롬비아 커피가 괜히 유명한 게 아니다. 적절한 고도와 기후가 빚어낸 자연의 선물이 바로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브라질은 전 세계 커피 생산량의 절대강자다. 다른 상위 5개국 생산량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양을 쏟아낸다. 하지만 양이 많다고 해서 무조건 최고급이라 부르지는 않는다. 스페셜티 커피의 세계에서는 '어디서' 자랐느냐가 훈장과도 같다. 땅이 품은 미네랄과 바람의 결이 원두 속에 고스란히 각인되기 때문이다.

테루아만 좋으면 끝일까. 전 세계에는 약 2,600만 명의 커피 농부가 땀을 흘리고 있다. 연간 생산되는 커피는 무려 1억 4천 2백만 자루에 달한다. 이 엄청난 양의 커피가 모두 같은 맛을 낼 리 만무하다. 결국 테루아는 기본이고, 그 위에 농부의 정성이 더해져야 비로소 명품이 된다.


수확과 가공, 맛을 조각하는 시간

커피나무에서 빨간 체리가 열리면 농부의 손길이 바빠진다. 기계로 우르르 털어내느냐, 사람 손으로 하나하나 따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 잘 익은 체리만 골라 따는 '핸드 피킹'은 고되지만 최고의 맛을 보장한다. 덜 익은 풋사과가 맛이 없듯, 덜 익은 커피 체리는 떫은맛의 주범이다. 우리가 마시는 스페셜티 커피 한 잔에는 농부의 지문이 묻어있다.

수확한 체리는 씨앗(원두)을 얻기 위해 껍질을 벗겨야 한다. 이때 햇볕에 말리느냐(내추럴), 물로 씻어내느냐(워시드)에 따라 운명이 갈린다. 내추럴 방식은 과육의 달콤함이 콩에 스며들어 풍부한 과일 향을 낸다. 반면 워시드 방식은 깔끔하고 정돈된 산미를 선사한다. 마치 태닝을 즐기는 야생마와 목욕 재계한 선비의 차이라고나 할까.

간혹 동물 학대 논란이 있는 루왁 커피 이야기도 짚고 넘어가자. 사향고양이의 소화기관을 통과한 원두라니, 희소성은 있겠지만 윤리적으로는 물음표다. 자연 그대로의 과정을 인위적으로 가두어 생산하는 방식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진정한 미식은 맛뿐만 아니라 그 과정의 아름다움까지 포함해야 한다. 동물도 행복하고 사람도 행복한 커피가 진짜 맛있는 커피 아닐까.


로스팅, 마법의 화학 시간

생두는 그저 딱딱하고 풋내 나는 씨앗일 뿐이다. 이 씨앗에 열을 가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가 아는 갈색 원두로 다시 태어난다. 로스팅은 단순한 가열이 아니라 복잡한 화학 반응의 향연이다. 빵이 구워질 때 나는 고소한 냄새, 바로 '마이야르 반응'이 커피에서도 일어난다. 여기에 당이 갈색으로 변하는 '캐러멜화'가 더해지며 달콤 쌉싸름한 맛이 입혀진다.

'스트레커 분해'라는 다소 어려운 이름의 반응도 한몫한다. 이는 아미노산이 분해되면서 커피 특유의 향기 성분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수백 가지의 휘발성 향기 물질이 팝콘처럼 팡팡 터져 나온다. 로스터는 이 찰나의 순간을 조율하는 지휘자와 같다. 1초라도 늦거나 빠르면 원두는 숯덩이가 되거나 비린내 나는 콩으로 전락한다.

갓 볶은 커피가 맛있는 이유는 산화 때문이다. 공기와 접촉하는 순간부터 커피는 향기를 잃고 기름 쩐내를 풍기기 시작한다. 이를 '산패'라고 부르는데, 맛있는 커피의 적이다. 그래서 커피 애호가들은 로스팅 날짜에 집착한다. 오래된 원두로 내린 커피는 김 빠진 콜라나 다름없다.


추출, 9가지 변수의 예술

드디어 마지막 관문, 추출이다. 원두 455g을 얻기 위해 커피 체리 3kg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는가. 이 귀한 원두 20g이면 325ml의 커피 한 잔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대충 물만 붓는다고 훌륭한 커피가 되지는 않는다. 추출에는 맛을 좌우하는 9가지의 까다로운 변수가 숨어있다.

물의 온도와 질, 원두의 입자 크기, 물과의 비율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물이 너무 뜨거우면 쓴맛이, 너무 차가우면 신맛만 도드라진다. 교반(휘젓기), 추출 압력, 추출 시간 또한 미세한 차이를 만든다. 어떤 필터를 쓰느냐, 어떤 용기에 담느냐까지 고민해야 한다. 이공계생인 나조차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의 변수들이다.

결국 맛있는 커피 한 잔은 기적에 가깝다. 좋은 테루아, 농부의 정성, 로스터의 기술, 그리고 바리스타의 세심함이 만나야 한다. 오늘 당신이 마신 그 커피 한 잔에는 수많은 사람의 노고와 과학적 우연이 담겨있다. 알고 마시는 커피는 쓴맛조차 달콤하게 느껴질 것이다. 자, 이제 식기 전에 그 기적을 한 모금 들이켜 보자.


하루에 한 잔 이상의 커피를 마신다. 단순히 접해 든 한 잔의 커피 속에도 많은 사실과 복잡한 과정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오늘도 따뜻한 커피 한 잔 마시러 동네 카페에 가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에이전트는 어떻게 월급을 받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