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급, 어른들의 성적표

쉽지만은 않은 파도를 넘어가는 당신에게

by 고래 아저씨

연말과 연초즈음에 직장인들에게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시간이 있다. 바로 진급 발표 시즌이다. 주임, 대리, 과장, 차장, 부장으로 이어지는 그 한 칸 한 칸의 계단. 누군가는 오르고, 누군가는 제자리에 머문다. 그리고 누군가는 팀장이나 파트장이라는 직책이라는 이름표를 달게 된다.

학창 시절을 떠올려 보면 조금 다르다. 시험 성적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영역이었다. 밤을 새워 벼락치기를 하든, 석 달간 계획을 세워 공부하든, 노력은 대체로 점수로 돌아온다. 물론 어느정도의 운도 작용은 하지만 적어도 내가 쏟은 시간만큼은 어딘가에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회사에서의 진급은 그 비율이 사뭇 다르다.

노력도 중요하지만, 운이라는 변수가 생각보다 크게 작용한다. 잘 나가는 사업부에 배치되어 승승장구하는 동료도 있고, 실력은 출중한데 팀 사정이나 타이밍이 맞지 않아 발목 잡히는 선배도 있다. '운칠기삼'이라는 말은, 직급이 올라갈수록 더욱 실감 나는 진리가 된다. 만약 진급이 오직 노력으로만 결정된다면, 그건 그것대로 참 가혹한 세상일지도 모른다. 피라미드 조직이라는 건 결국, 누군가는 꼭대기로 가지만 누군가는 중간 어딘가에서 멈춰 서는 구조니까.

진급과 직책은 단순히 호칭이 바뀌는 일이 아니다. 그건 조직이 나를 인정했다는 사회적 승인이고, 영향력과 책임이 확장되는 신호다. 경제적 보상도 따라오고, 업무 환경도 달라진다. 무엇보다 심리적으로는 자기효능감이 올라가고, 일에 대한 동기가 다시 불타오른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는 어떨까.

진급하지 못한 날, 우리는 부당함을 느낀다. 소외감과 민망함이 뒤섞이고, 회사에 대한 서운함이 은근히 쌓인다. "내가 뭘 잘못했지?"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돈다. 이럴 때는 나의 가치와 회사의 평가를 분리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냉정하게 복기하고, 객관적으로 상황을 바라봐야 한다고도 한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운가.


축하와 위로, 그 사이의 온도

진급 시즌에는 사무실 공기가 묘하게 갈린다. 누군가는 웃지만 웃지 못하고, 누군가는 애써 무표정을 유지한다. 이때 필요한 건, 조금 섬세한 배려다.

가까운 동료나 후배가 진급의 고배를 마셨다면 진심으로 그 사람의 실력을 인정해 주는 게 좋다. "네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다 알고있어"라는 한마디와 함께 소주 한 잔 건네는 것. 그 작은 제스처가 생각보다 큰 힘이 된다.반대로, 진급하지 못한 선배나 상사에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선배님한테 배울 점이 정말 많아요"라고 말하거나, 그동안의 구체적인 노고를 언급해 주는 것도 방법이다. "지난 프로젝트 때 선배님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처럼, 추상적이지 않은 진심 어린 말.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어설픈 위로로 상처를 주느니 차라리 침묵을 택하는 것이다. "아, 그냥 운이 안 좋았나 봐요" 같은 말은, 사실 아무 도움이 안 된다.


시간축을 넓혀 보는 연습

우리는 대부분 지금 이 순간에 갇혀서 회사를 바라본다. 올해 진급했느냐, 못 했느냐가 전부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조금만 시야를 넓혀 보면, 직장 생활은 생각보다 긴 여정이다.

지금이 아니라 생애 주기로 회사를 바라보는 게 현명하다. 30년을 일할 사람에게, 올해 한 해의 결과가 전부일 리 없다. 물론 이 말이 지금 당장의 실망을 덜어주진 않는다. 그래도 조금은, 숨 쉴 여유를 준다.

그리고 회사 밖의 나를 떠올려 보는 것도 좋다. 나는 직장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의 파트너이고, 누군가의 가족이고, 친구다. 회사가 전부가 아니라는 말은 진부하지만, 진급 시즌에는 유독 절실한 진리가 된다. 나는 회사의 평가로만 정의되는 존재가 아니라, 독립된 한 사람이다.


성공보다 성장에 집중한다는 것

회사에서 성공은 타인이 결정한다. 진급 여부, 직책 부여, 프로젝트 배정. 이 모든 건 내가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하지만 성장은 다르다. 성장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과정이다. 올해 내가 배운 것, 시도한 것, 실패하고 다시 일어선 경험. 이런 것들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다. 진급은 회사가 주는 것이지만, 성장은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을 지금 당장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나 역시 그 시린 순간들을 겪으면서, 이런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성장에 집중하라"는 말이 그저 공허하게 들릴 때도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때의 아픔이 결국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는 걸 알게 됐다.

마음에도 근육이 있다. 시린 감각을 잘 견뎌내면, 그 근육은 조금씩 단단해진다. 그리고 그 단단함이, 다음 시즌을 버티는 힘이 된다.


그래서, 이번 시즌은 어떠셨나요

진급 시즌은 해마다 찾아온다. 누군가는 기쁘고, 누군가는 아쉽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중요한 건, 이 시즌을 어떻게 통과하느냐가 아니라, 이 시즌 이후를 어떻게 살아가느냐다. 진급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고, 진급하지 못한 것도 끝이 아니라 과정의 일부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니 오늘 밤, 진급한 동료에겐 진심 어린 축하를. 진급하지 못한 선배에겐 조용한 응원을. 그리고 나 자신에게는, "수고했어, 잘하고 있어"라는 한마디를 건네 보면 어떨까.

그렇게, 우리는 또 한 해를 지나간다. 어른의 성적표를 받아 든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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