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날
아침마다 반복되는 일상은 때로는 안정감을 주지만, 가끔은 무채색 필터를 낀 것처럼 건조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매일(거의) 아침 출근 전, 수영장으로 향하는 루틴을 고집스럽게 지키고 있다. 늦장을 부리다 허겁지겁 집을 나선 날에도, 미지근한 물 속에 몸을 유영하는 그 순간만큼은 포기할 수가 없다.
내가 가는 수영장은 월, 화, 목, 금요일에 정기 강습이 있고 수요일은 자유 수영을 하는 날이다. 그래서 수요일 아침에는 키오스크 앞에서 3,000원을 결제하고 입장권을 끊어야 한다. 여느 때처럼 비몽사몽 한 상태로 카드를 꽂고 결제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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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적인 손놀림으로 영수증을 받아 들었는데, 눈에 들어온 숫자가 어딘가 이상했다. 분명 3,000원이 찍혀야 할 자리에 2,100원이라는 낯선 숫자가 인쇄되어 있었다. 순간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내가 잠결에 '경로 우대'나 '청소년 할인' 버튼을 누른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화면을 아무리 다시 들여다봐도 나는 분명 '성인' 버튼을 정확히 눌렀다. 혹시나 기계 오류로 인해 나중에 입장 망신을 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소심한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900원 차이지만, 찝찝한 마음으로 탈의실에 들어가는 건 영 개운치 않은 일이다. 결국 나는 카운터로 발걸음을 옮겨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저기요, 원래 3,000원인데 2,100원만 결제가 되었네요. 이거 뭔가 잘못된 거 아닌가요?" 직원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별일 아니라는 듯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오늘 문화의 날이라서 할인된 거예요."
아, 문화의 날이라니. 그제야 안도감과 함께 피식 웃음이 나왔다. 고작 900원, 과자 한봉 값도 안 되는 돈이지만 기분만큼은 그 이상으로 기분이 좋았다. 그 900원의 예상치 못한 행운 덕분에, 그날의 물살은 유난히 부드럽게 느껴졌다.
수영을 마치고 나오면서 문득 '문화의 날'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들어본 적은 있는데 정확히 무얼 하는 날인지는 알지 못했다. 검색해보니 2014년부터 매달 마지막 수요일을 '문화가 있는 날'로 지정해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영화관, 박물관, 미술관, 스포츠 관람 등 다양한 문화 시설에서 할인 혜택을 주고, 도서관에서는 대출 권수를 두 배로 늘려주기도 한단다.
이렇게 좋은 취지의 날이 있었다니, 그동안 나는 수요일(마지막주)마다 무엇을 하고 살았나 싶었다. 혜택의 목록을 훑어보다가 '영화 관람 할인'이라는 문구에서 시선이 멈췄다. 갑자기 며칠 전 아내가 지나가듯 흘렸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요새 그 영화 재밌다는데, 영화관 안 간지도 참 오래됐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언제부턴가 영화관이라는 공간과 멀어졌다. 연애 시절에는 주말 데이트의 필수 코스가 영화관이었는데 말이다. 팝콘 냄새 가득한 로비에서 상영 시간을 기다리며 설레던 그 공기가 이제는 꽤나 낯설게 느껴진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바쁘다는 핑계도 있었지만, 더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넷플릭스나 유튜브 같은 OTT 서비스가 일상을 점령하면서,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아도 방구석 1열에서 수많은 콘텐츠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화면 버튼 하나면 전 세계의 영화가 내 눈앞에 펼쳐진다. 편리함이라는 달콤한 과실을 맛본 뒤로, 영화관까지 가는 수고로움은 불필요한 비용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아내는 조금 달랐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극장의 큰 화면과 웅장한 사운드를 경험시켜 주고 싶어 했다. "우리가 가서 봐줘야 영화 산업도 발전하고 그러는 거지." 아내가 가볍게 던진 그 말에, 나는 속으로 뜨끔하면서도 겉으로는 "요즘 표값이 얼마인데 집에서 편하게 보자"며 에둘러 넘기곤 했다.
오늘 900원 할인에 기뻐하다 문득 깨달은 사실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단지 '영화관 방문'이라는 행위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영화관을 가기 위해 옷을 차려입고, 집을 나서서 거리를 걷고, 극장의 어둠 속에서 타인들과 함께 웃고 우는 그 모든 과정이 사라졌다. 우리는 '문화적 경험'을 '콘텐츠 소비'로 대체해버린 것이다.
야외에서 오감으로 느끼던 입체적인 문화 생활이, 실내에서 시각과 청각에만 의존하는 납작한 소비로 축소되었다. 물론 무엇이 더 우월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방구석의 안락함은 현대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특권 중 하나니까. 하지만 편리함에 취해 경험의 근육이 퇴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경험의 축소는 곧 감각의 무딤으로 이어진다. 집에서 넷플릭스를 보다 재미없으면 5분 만에 끄고 다른 영상을 찾는다. 인내심을 가지고 서사를 따라가며 사색할 틈을 주지 않는다. 반면 영화관에서는 꼼짝없이 앉아 스크린과 대면해야 한다. 그 강제된 몰입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삶을 깊이 들여다보고 공감하는 연습을 하게 된다.
수영장 할인으로 시작된 생각의 꼬리는, 어느새 '문화'라는 단어의 무게감으로 이어졌다. 단순히 싸게 보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행위 자체가 우리 삶에 어떤 무늬를 남기는지가 중요하다. 900원의 할인이 내게 준 진짜 선물은, 잊고 지냈던 '나가는 즐거움'을 상기시켜 준 것일지도 모른다. 문화는 결국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겪어내는 것임을 다시금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