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옥터 순례길을 따라 - 종로성당
종로를 따박따박 걸었다. 바뀐 부분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상가 건물은 시간 속에 그대로 남았다. 피카디리 극장과 단성사, 서울극장을 다람쥐처럼 왔다 갔다 오가던 기억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세상을 휘젓던 그 시절 젊음들은 어디로 구석구석 숨은 걸까. 하루가 아쉬워 놀기 바쁘던 청춘은 ‘인제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어정쩡한 모습으로 성당을 찾고 있다.
종로성당 성전의 십자가는 깊은 어둠에서 빛나고 있었다. 푸른 간접 조명으로 예수님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십자가의 테두리만이 신비스럽게 빛을 뿜었다. 기도하는 어떤 한 분을 제외하고 성당 안은 묵직한 침묵 안에 잠겨있었다. 마치 예수님이 매달려 돌아가시고 나서 먹구름이 끼고 온 세상이 캄캄해진 순간처럼 느껴졌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그 구절이 떠올랐다. 언덕 위의 예수님과 하느님 사이의 교감 그리고 나는 그곳의 증인으로 앉아있는 것 같았다. 이런 건 또 처음 하는 경험이었다. 평소의 나는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봤을 때 말고는 그 장면을 거의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말이다.
아래에는 좀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파티마의 성모님이 황금 보관을 쓰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두 손을 모으고 계셨다. 흰 옷자락에 황금 수가 놓인 모습이었는데 나는 내 책상 위에 노상 작은 성모상을 올려놓고도 방금 전까지 그것이 파티마의 어린 목동들에게 나타나신 성모님이란 걸 몰랐다.
성전 천장을 올려다보자 아마도 예수님의 12 사도인 듯 하얗고 커다란 원판 안에 칸별로 열두 사도의 모습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었다. 고전 건축을 좋아하는 나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하느님 여기 참 좋네요. 그런데 너무 좋아하면 안 되겠죠?’
하느님은 화려한 성전뿐 아니라 가난한 자와 함께 계실 테니 말이다. 더군다나 아까 올라오는데 여기가 옥터 순례지란 표시에 ‘옥터? 이름은 예쁜데… 이런… 감옥 가는 길…’ 나의 무지함에 한숨이 나옴과 동시에 이 순례지도 곧 마음이 무거워질 곳임을, 감당하기 만만찮은 곳임을 예상했다.
아래층으로 가는 계단 벽에는 곤장이 종류별로 걸려있었다. 어릴 때 오지게 맞은 경험이 있는 나는 내려가면서 벌써 맞으러 가는 기분이었다.
조선 교구를 담당한 리델 주교의 서한으로 당시 참상을 알 수 있었다.
“나이는 26세였고 막내가 겨우 6개월 된 두 아이의 어머니였다. 감옥에 있던 사람들이 나에게 말하길, 그녀가 나약한 마음에 배교를 하였다고 하였다. 그녀는 아무도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틈틈이 나를 바라보며 여러 차례 십자성호를 그었는데 그런 모습을 보노라면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자신이 배교라는 몹쓸 짓을 하였다는 것에 대해 자책하며 죄인이라고 말하였다…”
“옥졸두목은 우리와 친구처럼 지내고 있어서 문을 잠그기 전에 종종 우리가 있는 곳에 와서 저녁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 당시엔 감옥이 신자로 가득 차 있어서 빈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매일 우리가 상당수를 교살했어요….’”
‘순교자’라는 엄중한 단어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이 조금 희석되는 것 같았다. 아기들을 안은 젊은 엄마는 자식을 지키기 위해 배교를 했고 감옥에서 끊임없이 자책하며 성호를 그었다. 건장한 농부들도 끌려와 결국 얻어맞다 굶어 죽었고 이들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는 푸른 눈의 서양 주교가 있었다. 사극의 한 장면 같기도 했고 한편으론 그 모습이 150년 전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삶처럼 생생하게 그려졌다.
성녀 이 바르바라 (순교, 14세, 포도청 병사)
포도청에서의 옥중 생활은 굶주림과 목마름의 연속이었으나 그녀의 신앙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형조로 이송되었다가 포도청으로 되돌려 보내졌으나 옥중에 유행하던 장티푸스에 걸려 1개월의 병고를 치르고 14세의 나이로 순교하였다.
좌포도청 순교자 복자 윤유일 바오로, 복자 최인길 마티아, 복자 지황사바 관련 증언
‘그리스도를 저주하고 모욕하라.’고 하자 그들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참된 하느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느니 차라리 천만 번 맞고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포도청 재판관들이 ‘그들의 뺨을 때리고, 곤장을 치고 주리를 틀라.’고 지시하였지만, 모두 다 소용이 없었다.
유대철 베드로 용덕 기록
“열네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살이 다 떨어져 나가고 뼈가 드러나도록 아주 혹독한 형벌을 가했지만 죽지도 않았다.”
혼란스러운 세상… 어떤 인생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볍고 추악하며 혐오스러운 반면 오로지 믿음 하나로 처절한 육체의 고난을 이긴 삶이 있었다. 모욕을 주고 참혹한 형벌을 가해도 그들에겐 ‘모두 다 소용이 없었다.’
. ‘배교를 일단 하고 나서 조용히 믿음을 지키면 안 되나?’ 매우 속물적인 나는 몇 번의 배교를 하고도 남았으리라.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가 생각났고 저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해야 했다. 말로만 들어오던 그들은 진정 우리가 기억해야 할 ‘믿음의 조상’이었다.
돌아오면서 밟은 인도는 단단하고 널찍한 짙은 회색 돌판 같았다. 쉬이 이 길을 걸으며 오래전 여기를 밟았을 다른 이들을 생각했다. 먼지를 일으키며 앞을 향하는 낯선 걸음 위엔 눈물과 한숨 또는 핏방울 서린 기도가 함께 했을 것이다. 역시 우리가 오늘 누리는 일상은 그냥 절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쌀쌀한 1월 오후의 바람에 검은 패딩으로 무장한 어깨들이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난 그렇게까지 춥지 않았다. 지친 육체로 발걸음은 끌렸을지라도 아무도 앗아갈 수 없는 누군가의 마음속 피 끓는 신심을 다시금 떠올렸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