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기꺼이 내어드릴 뿐이다 - 종로 가회당 성당
미세먼지 없이 맑은 오후 남편과 종로 가회동 성당으로 향했다. 북촌의 한옥들 사이에서 그냥 쓱 지나칠 수도 있는 작은 입구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은선재’란 이름의 작은 한옥이 있고 그 앞에 현대식 평범한 흰 건물이 있었는데 대성당과 부대시설이 있는 것 같았다. 가까이 가자 성 베드로 성당에서 들릴 법한 경건한 그레고리안 성가가 흘러나왔는데 마주 보이는 한옥과 대조를 이루며 조용히 울려 퍼졌다.
아기 예수님을 안은 회색의 모자상을 보고 작은 계단을 오르니 두 팔을 벌리고 순교하신 듯한 성인의 부조상이 보였다. 안은 작고 평범했다. 깨끗한 흰 벽 위에 높이 계신 십자가의 예수님과 그 옆에 성모상이 다였다. 좀 특이하다면 성모상이 옅은 청자빛을 띠고 있달까. 작고 아주 고운 성모님이었다. 2층에 오르간이 있었는데 연주자가 좀 빠른 연주곡을 연이어 치고 있었다.
제대 앞 십자가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떠오른 말씀.
“아쉬울 것 없어라.”
‘그러게요, 주님. 마땅히 아쉬울 것 없어야 맞을 텐데… 저는 그래도 아쉬운 게 많은 데요…. 제 인생도 인간 관계도 제 일도 뜻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고 겨우 한 고비 넘었다 싶으면 항상 더 큰 짐을 지어주시잖아요.’
독실한 사람들이 다 털어놓으래서 나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재작년 가을을 떠올렸다. 어느 날 집 천장이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갈라졌다. 생전 처음 보는, 마치 홍해처럼 쫙 갈라진 천장을 올려다보며 ‘도배하려면 귀찮겠는데’ 했다가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이제 이 집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계시일까? 그리고 갑자기 뜻하지 않은 이사를 했고 30여 년 묵은 짐을 그 참에 정리할 수 있었다.
인생의 다음 장으로 넘어가라는 뜻 같았다. 내가 전혀 계획한 게 아니었지만 하늘에서 뭔가 변화의 기운을 주시는 게 분명했다. 마침내 길고 긴 고난이 끝나고 이제 상을 주시는 건가 생각했다. 가을에는 새집 정리하느라 바빴고 첫눈이 내리자 행복했다. 창 밖은 수묵화처럼 아름다웠고 나뭇가지에 두텁게 쌓여가는 눈을 보며 감사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며칠 후… 내 앞에는 인생을 뒤흔드는 쓰나미가 덮쳤다.
아래층 전시실로 내려가 보았다. 조선 최초의 외국인 주문모 신부가 집전한 1795년 4월 5일 한국 천주교회의 첫 미사장면 등을 재현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교과서에서 이름만 들어본 ‘천주실의’며 그 당시 참혹했던 천주교 박해를 소개한 프랑스 잡지도 시선을 끌었다.
“ 거룩한 순교자의 영혼이 하느님께로 날아가자 구름이 걷히고, 폭풍우가 가라앉고, 아름다운 무지개가 나타났다. 순교자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렸고, 시신은 다섯 날 다섯 밤 동안 그대로 버려져 있었다. 그러나 매일 밤 찬란한 빛이 시신 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였다.”
신도는 신부를 피신시키고 자신이 신부인 척 순교를 자처했으며, 여인들은 전교에 앞장서고 기꺼이 자신의 집을 내놓았다.
“영혼과 육신이 다 천주께서 주신 것이요, 이 집 역시 천주님의 것인데 당신께서 당신의 것을 쓰시겠다니 기꺼이 내어드릴 뿐이다” - 전 마리아
남편에게 브로셔를 보여주었다.
“이거 봐. 여기서 영친왕의 비가 세례 받았대. 이건 영친왕 사진.”
“영친왕? 그게 누군데…?”
“너희 조상이요.”
“아….”
한때 주색잡기에 능했으나 지금은 가만있어도 기력이 없는 양녕대군의 후손이 말했다.
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영친왕은 본인의 조부 흥선대원군이 천주교인들을 무참히 사형시킨데 참회하며 속죄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부는 세례를 받았고 이곳 역사의 한 부분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쇄국정책과 일제 치하의 우리를 깨어나게 한국 천주교의 역사의 중심에 가회동성당이 세워졌다.”
무너져가는 나라 조선을 바꾸고자 ‘서학’이라는 정신을 받아들인 사람들과, 그 가르침을 지키고자 기꺼이 집과 자신의 목숨까지 남김없이 내놓은 이들의 흔적 앞에 차분하고 겸허해졌다.
고통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 옛날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게 하느님이 역사하실 거라고 했다. 보라. 오래전 비참한 고통은 이제 자랑스러운 역사가 되었다. 나는 티끌과도 같은 피조물일 뿐이지만 하느님이 또한 지으셨다니 아마도 그럴 것이다. 순간순간 그 사실이 도저히 안 믿기기도 하지만 오늘의 증거 앞에 다시 마음을 되새겨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