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은 나는 성당을 걸었다

4. 평안을 달라며 - 성 정하상 기념경당 (서소문 성지)

by 작약

주상복합인지 너무나도 도회적인 건물들 뒤편에 ‘서소문 역사공원’이 있었다. 1월의 날씨에 잔디는 맥없이 누런 색깔이었다. 공원 입구 정면에는 압도하는 규모로 3개의 우뚝 솟은 순교자 현양탑이 있었다. 빛바랜듯한 구릿빛 중앙면에는 십자가상과 함께 밧줄에 묶이거나 목도(木刀)를 달고 있는 순교자들의 처절한 모습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그 양쪽 기둥에 순교성인과 순교자들의 이름이 길게 나열되었는데 추운 날씨 탓인지 그들의 죽음이 더 시리게 느껴졌다. 1801년 신유박해부터 기해박해, 병인박해 등 너무나 많은 이들이 바로 여기서 처형당했다. 그들의 명복을 빌며, 나는 상한 심령으로 내 가정의 불행도 봉헌했다. 뺨에 닿는 공기는 차가웠고 혼자 또 울컥해 버렸다.



이제 그냥 돌아설까 하다 기념관이 있는 것 같아 안쪽으로 향했다. 그 지하에 생각지도 못하게 큰 역사박물관이 있었다. 속된 나는 마치 인디애나 존스가 촛불을 밝혀 동굴 속을 살피듯, 지하에 숨겨진 그 고요하고 정적인 공간의 규모에 놀라 입을 벌리고 두리번거렸다. 서울에 이런 데가 있다니…. 조형물들과 작은 전시실을 지나 ‘성 정하상 기념경당’으로 향했다. 성당이 아니고 경당은 뭐지 싶었지만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사람이 의외로 많이 모여 있었다.


한쪽의 붉은 벽돌벽 이외엔 그저 하얗고 텅 빈 공간이었는데 제대 앞에 아주 작고 가는 금속 십자가상이 서 있었다.

‘자, 이제 말씀을 주세요.’


매우 지친 듯 고개를 떨군 십자가상의 예수님을 보자 바로 말씀이 생각났다.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이 낯선 공간에서 어릴 적 미사에서 듣던 한 소절이 잔잔히 마음에 울려 퍼졌다. 일어나려는데 분위기가 미사 시작 전이었다. 이건 계획에 없던 건데 하며 망설이는데 다시 마음에 딱 하나의 문구가 떴다.

‘하느님의 초대’.

나는 오늘도 힘들어했고 그래서 미사 안에 함께 있자고 하신 것 같았다. 그렇게 뜻하지 않게 미사에 참여한 나는… 졸았다.

‘평안을 달라며…?’

조금 전에도 평안을 달라며 울다가 정작 미사에 와서 신부님 강론에 졸고 있는 나를 보며, 하느님은 ‘달라니까 줬는데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한심해하셨음이 틀림없다. 핑계를 대자면 나는 2번 울었고 오늘은 영하 10도에 가까웠고 실내에 들어오니 노곤해졌다. 졸면서도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과 치유와 구마(驅魔)를 하러 오셨다는 신부님의 말씀을 되뇌었다.

미사가 끝나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사방이 벽으로 어두운 가운데 뻥 뚫린 장소가 또 숨어 있었는데 ‘콘솔레이션홀’이라고 했다. 벽에는 360도로 영상이 비췄고 조용한 울림이 이어진 신비스러운 공간이었다.




더 안쪽 상설전시실은 아치와 직선의 모던한 조형미와 아름다운 빛이 돋보이는 공간이었다. 조선 후기 역사적 자료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천주교 금교령을 내린 영조의 어리고 못된 계비 정순왕후의 편지부터 그 유명한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도 있었다.


“사학이 더욱 기승을 부려 전국에서 퍼지고 있다. 만약 사학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관가에 알려 경계하여 다스리되, 마땅히 코를 베는 형벌을 내려 모조리 없애버림으로써 남아있는 종자가 없도록 하라.


‘마땅히 코를 베라.’

오늘날 우리 사회 종교는 성당을 갈지 교회에 갈지 절을 다닐지 개인의 선택 문제이며 사이비이단 종교인들 비난하거나 혀를 차면 그만이다. 그 시대 권력층에선 왜 이리도 강경했을까.


‘불안이다.’ 그 때문이라 생각했다. 불안은 공포를 야기하고 이성을 마비시키며 폭력을 수반한다. 마치 21세기 팬더믹처럼 점점 다가오는 공포로 이들은 이성을 잃었을 것이다. 다른 세상을 꿈꾸듯 하늘 저 너머를 바라보는 눈빛과 영적 정화로 훤히 빛나는 교인들의 얼굴을 보며, 그리고 몇 십 년의 처형이 지나도 사라지기는커녕 점점 퍼져가는 세력을 보며 완전히 오금이 저려왔을지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멀쩡한 여인네의 저고리를 벗겨 남자들 앞에서 매질을 하거나 코를 베거나 수많은 사람의 목을 무 자르듯 하는 짓을 할 수 있었겠는가.




역사의 아이러니인지 모른다. 사치를 일삼고 호화스러운 궁전을 짓던 프랑스 왕족들은 국가의 재정을 망쳤지만 후세들이 그 유적으로 앉아서 돈을 벌게 만들었다. 나라를 지키겠다며 변해가는 세상의 문을 닫아 건 이 나라 권력층은 되려 나라를 빼앗기고 결국 온 천지를 전쟁으로 몰아넣는 비극을 낳는다. 그들이 좀 더 사고에 유연했더라면 나라의 미래는 달라졌을까. 그리 떠받들던 조선의 이념 성리학 또한 결코 이 땅에서 난 것이 아님을 깨달았더라면….


“대안을 찾은 이들은 미련 없이 자신을 가두던 세계에서 다른 세상으로 넘어가는 길을 진지하게 찾아나갔다. 그로 인해 겪어야 하는 자기희생과 순국 그리고 순교 또한 기꺼이 받아들였다.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에 스스로 몸을 던진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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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걸어 나오자 대형 나전칠기 작품이 벽에 걸려 있었다. 전통 기법이었지만 피에타상과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장면도 찾을 수 있어 인상적이었다. 2014년 프란시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과 한국 순교자 시복 시성을 위한 작품이라고 한다.


아까 놓친 경당 안의 피에타상을 보러 계단을 올랐다. 벽의 안쪽에 쪽진 머리 조선의 어머니가 죽은 아들을 안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들의 머리를 가슴에 품었다. 아들을 잃고 슬픔에 잠긴 성모 마리아는 이곳에서 처형당한 아들의 머리를 안은 아낙의 모습이었다. 그 비통함이 거친 나무 조각상임에도 깊은숨을 몰아쉬게 만들었다.


밖을 나오자 늦은 저녁 햇살이 차가운 건물과 메마른 잔디를 비추었다. 꽤 오래전 망나니는 여기 한쪽 우물가에서 칼을 씻고 누군가의 목은 땅을 구르고 누군가는 울부짖었으리라. 아니 어쩌면 조용히 눈물만 흘리며 두 손을 모았을지 모른다. 마치 디카프리오의 영화 ‘갱스 오브 뉴욕’의 라스트씬처럼 흩뿌려진 핏자국 위로 흙이 덮이고 새로 풀이 자랐을 것이다.

200여 년의 시간을 관통하며 나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제 나는 마음껏 하느님을 부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