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동백꽃 앞에서 - 제주 정난주 마리아 묘 & 모슬포 성당
제주도의 날씨는 다행히 맑았다. 성지 순례를 위해 작정하고 내려온 것이라 다른 때 슬슬 걸어 다니던 여행과는 확실히 마음이 달랐다. 스스로에게 거창한 글을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었지만 아주 약간의 소명 의식이 생겼다.
첫 성지 ‘정난주 마리아의 묘’에 도착했다. 검은 돌로 소박하게 만든 아치며 흐드러지게 피고 이제 마지막 흔적을 남기는 동백꽃을 보며 제주도라는 것이 실감 났다. 입구로 들어서자 꽃나무들 사이로 십자가의 길이 드문드문 보였다.
“정난주가 누군데?”
“그래, 정난주가 누구지?”
누군지도 모르고 열심히 찾아온 남편과 나는 게시판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정’씨라 짐작이 아주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나 그분은 실학자 정약용의 조카였고 무덤으로 기려질 만큼 파란 많은 삶을 살다 가셨다. 어머니 집안 역시 믿음의 조상이었고 남편 황사영은 17세에 장원급제하여 정조대왕으로부터 학비를 지원받은 영특한 인재였으나 천주교를 믿으며 현세에 등을 돌렸다고 한다. 전교에 힘쓰다 박해로 대역죄인이 되어 능지처참 당했고 두 살 난 아들은 추자도에 정난주 마리아는 제주도로 귀양가게 되었다. 어린 아들과 생이별한 그녀는 관노로 갖은 시련을 겪다 풍부한 학식과 교양으로 주민들을 교화시켰고 노비 신분에도 이웃들의 칭송 가운데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다 이곳에 안장되었다 한다.
본인 스스로 명문가였으며 남편은 장원급제한 영재였고 아들도 있는 어찌 보면 세상 아쉬울 것 없이 양반댁 귀부인으로 편히 살 수 있는 운명이었다.
‘하느님, 그래도 너무 잔인해요….’
믿음의 대가는 이렇게까지 멸문과 죽음이어야 하는지. 사극 속의 그 유명한 ‘능지처참’이란 말은 ‘산 채로 조금씩 살을 도려내고 머리, 팔, 다리로 사체를 절단하여 각기 다른 지역으로 보내버리는 것’이란다. 남편의 처절한 죽음과 어린 아들을 빼앗긴 슬픔 앞에 노비로 전락한 신분은 비할 바가 아닐지 모른다.
하느님이 잔인하신 게 아니라 종교를 이유로 그 무도한 형벌을 기획하고 집행한 인간이 문제겠지. 정난주 마리아의 삶을 알게 되자 흐드러지게 흩뿌려진 동백꽃의 잔해가 그분의 피맺힌 삶과 연계되었다.
먹먹함을 뒤로하고 모슬포 성당으로 향했다. 성당은 푸른 하늘 아래 아주 단정한 모습으로 자리했다.
내부는 크진 않지만 정돈되고 깔끔했다. ‘모슬포’란 이름은 ‘모래가 많은 바닷가 마을’이란 뜻이었다. 그러나 예쁜 이름과 달리 이 땅은 질곡의 역사가 함께 했다. 일제강점기와 제주 4.3 그리고 한국전쟁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은 곳이었다. 모슬포 성당 자체가 한국전쟁 당시 군종 성당으로 시작되었고 바다를 내려다보는 ‘섯알오름’에선 사상검증으로 주민 130여 명이 집단 총살되었다고 한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오욕을 뒤로, 무심하게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부는 이곳의 모습은 그때나 이제나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래전 비극의 순간, 파도는 피로 붉게 물들고 바람 소리엔 하늘에 닿을 울부짖음이 함께 했을 것이다.
비행기 타고 와서 이 땅을 밟고 함박웃음을 짓던 나는 앞으론 여기 동백꽃 그리고 파도와 바람을 조금은 다르게 기억할 것 같았다. 하느님이 이 아팠던 땅에 이제는 축복을 주시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