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성이 이씨요 이름이 시돌인 줄 알았어요 - 성 이시돌 성지
차를 타고 성 이시돌 성지에 내렸을 때 남편과 나는 정말로 빵 터지고 말았다. 건물에 쓰인 ‘st.ISIDORE’는 성이 이씨요 이름이 시돌이인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나마도 헷갈려서 무식한 우리는 이돌인지 차돌인지 오면서 이름을 다시 검색해야 했다.
성 이시돌은 스페인의 농부이자 성인품에 오르신 온세계 농민들의 주보성인이라고 한다.
주변이 엄청나게 넓어서 시간이 있었으면 천천히 걸을 만했을 것 같았다. 우리는 시간에 쫓겼으므로 차로 금악성당에 도착했다. 성 클라라 봉쇄수도원 내에 있는 성당이었는데 성당만 일반인한테도 개방한다고 한다. 봉쇄수도원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는데 밖에 그저 서 있었는데도 좀 더 엄숙함이 느껴졌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자 정면에 금색으로 번쩍이는 인상적인 십자가가 보였다. 찾아보니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시스코와 관련 있는 산 다미아노 십자가라고 하며, 십자가 위 고난 중에 계시는 예수님과 달리 부활하신 승리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고 한다. 성 클라라수도원은 성 프란시스코의 영성을 따르는 가난한 자매의 수도원이라 그분에게 소중했던 산 다미아노 십자가를 모신다는 것이다. 여러 자매들이 집중 기도를 하고 계셔서 조용히 나왔다.
삼위일체의 성당으로 왔는데 문이 잠겨있어서 옆 계단을 올라가 보았다. 상당한 규모의 성당이 보였는데 야외성당도 처음 본 데다가 이렇게 하얗고 큰 공간이 신기해서 계속 혼자 두리번거렸다.
그곳의 작은 입구로 나가자 로마의 신전 기둥과 같은 곳이 나타났는데 그 밑에 예수님의 재판과정이 동상으로 보였다. 십자가의 길인 것 같았는데 각각의 장면이 너무나 생생하게 표현되어 야외극장에서 실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분명 기도를 하는 곳일 텐데 나는 휘둥그레진 눈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며 계속 발길을 재촉했다. 숨겨진 비밀의 공간을 탐험하듯 그리고 시간 속을 통과하듯 펼쳐지는 압도적 스케일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우리나라에 이런 데가 다 있었네.
길은 깨끗하게 잘 닦여있었고 너무도 고요해서 이따금 새소리만이 들렸다. 천천히 걷고 때로 벤치에 앉아 묵상하며 산책하기 정말 좋을 것 같았다. 좀 더 머물며 끝까지 돌고 싶었지만 남편이 차에서 기다리고 있어 발걸음을 돌렸다. 언젠가 남편에게도 성령님이 임하시면 같이 걷고 싶은 길이었다. 아니 집 가까이에 있어 머리가 복잡할 때 언제라도 찾고 싶었다.
다음 장소 새미 은총의 동산으로 이동했다. 이 이시돌 성지는 아일랜드 출신 임피제 신부가 가난하고 피폐한 제주도민들을 위해 목축업과 양돈업 그리고 요양원 등을 지어 제주 경제와 복지 발전에 헌신하신 곳이라고 한다.
목장을 지나 얕은 오르막을 오르자 하얗고 커다란 십자가상이 보였고 그 뒤 드넓은 호수가 나타났다. 숨을 헉 멈출 만큼 생각지도 못한 아름다운 풍경에 이번에는 함께 한 남편도 너무 편안해하는 것 같았다. 한두 명의 사람이 자리를 떠나자 조용한 호수는 온전히 우리의 차지였다. 멍하니 잔잔한 수면을 바라보자니 그동안 부대꼈던 마음의 동요가 가라앉으며 정결해지고 있었다. 이번 제주 순례에서 성 이시돌성지는 가장 마음에 간직하고 싶은 특별하고 보물 같은 곳이었다. 가을에 호수 주변으로 단풍이 지면 꼭 다시 찾아오고 싶었다.
지쳐있던 남편의 평안해진 미간을 보니 내 입가에도 미소가 배어 나왔다. 커다란 십자가 밑에서 가정을 위해 그리고 내 갈 길을 인도해 달라 구하며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진짜 여기 성이 이 씨에 이름이 시돌인 사람의 성지인 줄 알았는데
정말 좋네요. 이 길로 우연히 인도해 주셔서 감사해요,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