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이로운 작가
글을 쓴다는 것은 축복이다.
이 축복의 행위는 가장 자세하고 가성비가 좋은 창작행위라고 생각한다.
한강은 글쟁이다.
작가의 머릿속의 수많은 상상이 공상을 낳고 그 여문 공상은 망상이 되지 않고 환상적인 문장들로 피어난다.
한강의 문장이 5월의 꽃처럼 아름다움으로 만개할 수도 있지만, 소설 ‘채식주의자’의 육식과 폭력을 거부하고 망상이 집어삼켜 나무인간이 되어가는 영혜의 영혼은 시들어간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었을까?
무엇이 영혜의 정신을 서서히 온전치 못하게 갉아먹고 있었을까?
나는 그 원인을 아래 네 가지로 생각해 본다.
첫째, 그녀를 물었다는 이유로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죽어간, 심지어는 그 죽은 강아지의 사체를 먹은 죄의식이 영혜의 의식저편에 자리 잡고 있다가 영혼이 나약해지는 순간 영혜의 정신을 물어버린 건 아닌지? (동물권에 대한 과거 한국의 인식과 폭력적인 문화)
둘째, 고기를 안 먹는단 이유로 영혜의 입에 강제로 탕수육을 밀어 넣고 폭력을 가한 아버지. (폭력적인 가부장적 주변 가족들의 방관 및 베트남전에 참전한 아버지의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일그러진 부성애)
섯째, 자신의 일상에 마이너스가 될 것을 알고, 심지어는 친족의 여인을 탐한 죄로 모든 친족관계를 박탈당할 수도 있는, 과도한 예술적 열정의 욕망과 미적 갈망에 온전치 못한 오브제(영혜)를 이용해 버린 이기적인 형부.(인혜의 남편 즉, 형부는 일상이 허락하는 에너지의 총량을 초과하는 에너지를 가진 자가 운명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수치와 수모를 겪고 결국 자신의 작품도 건지지 못한 채 파멸하고 말고 그 사건으로 영혜는 정신병원에 감금되고 상태가 더 악화된다.)
넷째, 온순하나 고지식해 아버지의 손찌검에 유독 영혜가 가장 피해를 많이 보았으나, 그것을 반항이나 저항하지 못하고 순응하고 방관한 언니 인혜와 가족들(특히, 인혜는 본인이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으로 연결된 생존의 한 방식이었다고 ‘나무불꽃’ 편에서 고백한다.)
내가 제시한 원인 네 가지에 공통점이 있다.
폭력과 가족.
폭력은 암처럼 전이된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또한 폭력은 방관을 낳는다.
폭력의 목적은 공포다. 공포에 압도된 보통의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방관과 순응뿐이다.
한강 작가는 왜 폭력이라는 주제의 채식주의자에 가족이라는 재료를 넣었을까?
사회의 가장 작은 공동체 단위는 가정이다. 가장 작지만 가장 긴밀하고 가장 폐쇄적일 수 있다.
가정의 폭력은 그래서 더욱더 무섭고 고립되어있고 숨기기 쉽고 가정적이란 단어와 다르게 모순적이다.
인성 확립에 있어 가장 중요한 시기에 가장 작은 단위의 가정에서 신체적 폭력이든 언어적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은 그만큼 폭력의 전이가 잘되며, 공포의 감정으로 방관으로 순응하는 법을 먼저 배울 지도 모른다.
한강은 어렸을 적 예전 5.18 광주학살 동영상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때부터 한강의 문학가적 영혼에 폭력이라는 주제가 영혜처럼 의식저편에 자리 잡았는지도 모른다.
한강 작가의 인터뷰를 몇 번 보며 느낀 생각은 한강이라는 사람은 인간계와 신계의 중간쯤의 어딘가에 있는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 있다.
말투, 표정, 목소리 내가 한 번도 경험하지도 접하지 못한 사람의 결이며 노벨상 수강소감을 말할 때는 약간 경이롭기까지 했다.
아래는 한강의 노벨상 수상소감이다.
“여덟 살 때의 어느 날을 기억합니다. 주산학원의 오후 수업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맹렬한 기세여서, 이십여 명의 아이들이 현관 처마 아래 모여 서서 비가 그치길 기다렸습니다. 도로 맞은편에도 비슷한 건물이 있었는데, 마치 거울을 보는 듯 그 처마 아래에서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나오지 못하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쏟아지는 빗발을 보며, 팔과 종아리를 적시는 습기를 느끼며 기다리던 찰나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나와 어깨를 맞대고 선 사람들과 건너편의 저 모든 사람들이 '나'로 살고 있다는 사실을. 내가 저 비를 보듯 저 사람들 하나하나가 비를 보고 있다. 내가 얼굴에 느끼는 습기를 저들도 감각하고 있다. 그건 수많은 일인칭들을 경험한 경이의 순간이었습니다.
돌아보면 제가 문학을 읽고 써온 모든 시간 동안 이 경이의 순간을 되풀이해 경험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언어라는 실을 통해 타인들의 폐부까지 흘러들어 가 내면을 만나는 경험. 내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을 꺼내 그 실에 실어, 타인들을 향해 전류처럼 흘려 내보내는 경험.
어렸을 때부터 궁금했습니다.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 왜 고통과 사랑이 존재하는지. 그것들은 수천 년 동안 문학이 던졌고, 지금도 던지고 있는 질문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계에 잠시 머무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세계에서 우리가 끝끝내 인간으로 남는다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일까요? 가장 어두운 밤에 우리의 본성에 대해 질문하는, 이 행성에 깃들인 사람들과 생명체들의 일인칭을 끈질기게 상상하는, 끝끝내 우리를 연결하는 언어를 다루는 문학에는 필연적으로 체온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필연적으로, 문학을 읽고 쓰는 일은 생명을 파괴하는 행위들의 반대편에 서 있습니다. 폭력의 반대편인 이 자리에 함께 서 있는 여러분과 함께, 문학을 위한 이 상의 의미를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내가 문학을 좋아하는 이유와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저 경이로운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소감 글에 정확히 담겨있다.
‘언어라는 실을 통해 타인들의 폐부까지 흘러들어 가 내면을 만나는 경험. 내 중요하고 절실한 질문들을 꺼내 그 실에 실어, 타인들을 향해 전류처럼 흘려 내보내는 경험’
‘우리는 왜 태어났는지. 왜 고통과 사랑이 존재하는지. 그것들은 수천 년 동안 문학이 던졌고, 지금도 던지고 있는 질문들입니다.’
좋은 글은 읽기 어렵지 않으며 진심이 묻어나고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바로 저 수상소감 같은 글이다.
간혹 이해되지 않는 어렵고 현학적인 문장을 쓰면서 잘 읽히지도 않는 글들을 보면 작가가 문학적 폭력을 가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한강의 글은 전혀 어렵지 않고 잘 읽히며 감각적인 문장들이 내 머리와 심장을 때리며 지적으로 예술적으로 경이롭게 온몸을 자극한다.
한강은 경이로운 소설가다.
한강은 걸어 다니는 문학이다.
George 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