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개인으로 명징하게 직조해 낸 세련된 엔딩
지인의 추천으로 이번 주 독서모임의 토론책으로 정한 줄리언 반스의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The sense of an ending)’를 오늘 아침에 정신없이 읽었다.
추천인은 나에게 이 책을 다 덮고 나면 바로 다시 읽게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마지막 결말을 읽고 나는 카오스(혼돈)에 빠졌다.
다시 첫 페이지를 읽는 나와 3시간 전에 첫 페이지를 읽었던 나는 같은 작품을 읽었지만 3시간 전과는 다른 나였고 3시간 전과는 다른 작품을 다시 읽고 있었다.
잘 짜인 엄청난 퍼즐로 짜인 수작이었으며, 역사와 대중(보통사람)을 등장인물의 일련의 서사로 은유하는 빈틈없는 구성과 철학적이며 우아한 문체의 향연에 빠져들어버렸다.
이 책은 나의 짧은 식견의 비평 하나로 설명할 수 없는 잘 코딩된 위대하고 철학적인 소설임을 서두에 말해둔다. 비평의 재료가 너무 방대한 소설이다.
영국에 사는 주인공 토니의 학창 시절에는 3명의 친구들이 있었으며, 아래와 같이 작가는 친구들을 묘사한다.
‘앨릭스가 러셀과 비트겐슈타인을 읽었다면, 에이드리언은 카뮈와 니체를 읽었다. 나는 조지 오웰과 올더스 헉슬리를 읽었다. 콜린은 보들에 와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다.’
한국의 주입식 교육과는 다른 유럽의 건강한 수업시간의 토론문화에서 토니의 가장 명석한 친구이자 편부 밑에서 자란 에이드리언은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을 토론하는 수업에서 이야기한다. ‘ 음, 한 가지 의미에서 보자면, 저는 제가 알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건 철학적으로 자명합니다.’ 이 부분은 에이드리언이 줄곤 인용했던 말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라는 말에 관통되어 있다. 지적인 케임브리지 대학생 에이드리언의 역사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개인의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 만나면 어떤 일 년의 개인 일신의 변화를 야기할 수 있는지를 작가 줄 이런 반스는 역사에서 개인의 서사로 꽤나 세련된 방식으로 전도시킨다.
소설에서 토니는 베로니카라는 여자친구와 1년 정도 교체한다. 베로니카의 집에 방문하여 베로니카의 아빠, 오빠(에이드리언과 같은 캠브리지대학교 윤리학과), 그리고 이 집의 이방인 느낌이 나는 엄마 ‘사라포드’를 만나고 또한 학창 시절 친구들에게도 베로니카를 소개한다. 베로니카와 헤어진 후 친구 에이드리언으로부터 베로니카와 데이트를 해도 되냐고 묻는 편지를 받는다.
토니는 답장한다. ‘21일 자로 온 자네의 서신을 수령하면서, 본인은 모든 것을 유쾌하고 즐겁게 받아들이고 있음을 명시하고 상찬과 기원을 간절한 마음으로 바치네, 벗이여’ 쿨한 답장이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와 베로니카가 공동으로 느낄 윤리적 가책을 얘기를 하며 에이드리안에게 신중할 것을 권하고 그에게 온 편지를 벽난로 속에 태워버리며, 이제부터 그 두 사람을 내 인생에서 영원히 내치기로 토니는 결심한다. 그 기억으로 맞이하게 된 몇 개월인지 몇 년 후인지 모른 에드리언의 자살은 토니를 혼란스럽게 한다.
이 모든 일련의 사태는 아래의 죽은 에드리언의 일기장의 글과 두 가지 수식으로 완벽히 설명된다.
1) b=s-v+a1
2) 혹은 a2+v+a1xs=b?
a1은 에드리언이며 v는 베로니카 a2는 토니의 이름 앤서니이며 s는 베로니카의 의붓엄마 사라포드이며, b는 a1과 s사이에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아이(baby)이다.
에드리언은 베오니카의 엄마 사라포드와 관계를 가지고 b를 낳는다. 엄청난 반전이며 독자는 혼돈에 빠진다.
나의 위 수식에 대한 유전학적 논리학적 해석은 암수의 교미를 전제로 한다.
암컷의 수컷과의 교미에서 암컷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암컷은 밭이며 수컷은 씨앗이다. 1)식의 암컷 중 우성은 사라포드이며 열성은 베로니카이다. 그래서 아이는 사라-베로니카+에드리안이다. 즉 사라가 더 우성이고 에드리안은 사라와 교미를 한 것이다. 2)식에서 갑자기 a2(토니)가 끼어든다. 하지만 토니는 열성이다. 같은 아이를 잉태하기 위해서는 더한 열성보다 더 큰 우성의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a2(토니) 열성이 더해진 만큼 강력한 s(사라)의 우성이 곱해져 b가 잉태되지만 2)에서의 b는 a2의 열성+저주로 인해 b?라는 장애를 가진 아이로 잉태된다.
밀란쿤테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악보를 넣은 구성만큼 신박한 구성이다.
복잡다단한 역사적 사건인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의 원인을 단순하게 흑백논리로 정의할 수 없듯이 개인의 일련의 사건에 대한 행동과 자신의 기억의 편린이 어떤 사태를 유발할지는 단순하게 정의될 수 없음을 우리는 에드리언의 ‘역사는 부정확한 기억이 불충분한 문서와와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다’라는 문장으로 복기시켜보면 개인의 생각이 얼마나 몽매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면 소름이 돋는다.
토니의 에드리언과 베로니카에게 실제로 쓴 세상에서 가장 저주스러운 편지가 쿨한 답장으로 토니의 기억에서 조작되어 있으며, 우리의 역사 또한 유사할 수 있음을 우리는 의심한다.
주인공 토니는 무지한 대중으로 은유되며, 명석하고 지적인 캠브리지 대학 윤리학도인 에드리언은 말과 언어가 현인스럽지만 아이러니하게 윤리를 저버린 행동으로 너무나도 깔끔한 자살을 선택한다. 에드리언의 자살의 이유를 비윤리적, 부끄러움, 우정, 사랑, 장애를 가진 아이 등.. 우리는 정확히 단정하긴 어렵다.
하지만 에드리언은 아래의 자신의 언어를 행동으로 옮겼다.
‘그는 삶이 바란 적이 없음에도 받게 된 선물이며, 사유하는 자는 삶의 본질과 그 삶에 딸린 조건 모두를 시험할 철학적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만약 바란 적이 없는 그 선물을 포기하겠다고 결정했다면, 결정대로 행동을 취할, 윤리적, 인간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에이드리언은 죽음 후 검시관에게 자신의 주장으로 공표해 줄 것을 부탁했다.’ 즉흥적이지 않은 계획된 죽음이었다.
에드리언이 죽고 토니는 이야기한다.
‘에이드리언이 죽은 건 부럽지 않지만, 그 삶의 명징성은 부럽다. 그가 비단 우리보다 명징하게 보았고, 생각했고, 느꼈고, 행동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죽는 순간에도 그럴 수 있었기 때문에 부럽다.’
토니에게 에드리언은 좋은 친구였다.
하지만 토니는 무지했다. 천박하고 무지한 저주의 편지로 좋은 친구를 잃었다.
나에게도 좋은 지인이 있다.
나의 아픔을 진심으로 이해해 주며, 용기와 동기를 주며, 지적 동력을 주는 지인에게 나는 무지했다.
그 사람을 에드리언처럼 허무하게 잃고 싶지 않다.
오늘 밤 저주가 아닌 따뜻한 전화를 해야겠다.
George 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