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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 소설 ‘노인과 바다’ 비평

노인과 소년

by 조지조

노인은 과거에 엄청난 완력을 소유한 잘 나가는 어부였다.
하지만 노인이 된 그는 멕시코 만류인 걸프 스트림에서 작은 배를 타고 혼자 고기를 잡는 늙은이가 되었다.
그는 벌써 팔십사일 동안이나 고기를 한 마리도 낚지 못한 채 바다에 나가고 있었다.
처음 사십 일간은 한 소년이 그와 함께 나갔었다.
그러나 사십 일간이나 고기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자 소년의 부모는 노인은 이제 결정적이고도 최종적인 살라오(스페인어로 이제 운수가 끝장나서 최악의 불운을 만났음을 뜻하는 말) 상태에 이르렀다며 소년에게 다른 배로 바꾸어 타라고 한다.
어렸을 적부터 고기 잡는 법을 노인에게 배우고 수제자처럼 노인을 따랐던 소년은 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노인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따뜻한 그 소년은 부모님의 환승명령이 싫지만 어쩔 수 없다.
소년은 노인이 매일같이 빈배로 돌아오는 광경을 지켜보며 왠지 가슴이 아팠다.

노인은 야위었고 꺼칠했으며, 목덜미에는 주름이 깊게 잡혀고, 두 볼에는 열대 바다의 태양 반사 광선으로 인해 생긴 양성 피부암의 반점들이 있었고, 그의 두 손은 평생 물 직한 물고기를 다루느라 생긴 깊은 상처가 있었다.
그를 이루고 있는 것들은, 그의 두 눈을 제외하곤 그 어느 것이나 낡아 있었다.
다만 그의 두 눈은 바다와 같은 빛이었고, 밝고, 패배를 모르는 눈빛이었다.
“산티아고 할아버지!, 전 다시 할아버지와 함께 나가고 싶어요!’
소년에게 고기 잡는 법을 가르친 건 산티아고 노인이었다. 그래서 소년은 노인에게 애정을 품고 있었다.
“안 돼.” 노인이 말했다.
“넌 지금 운수 좋은 배를 타고 있어. 그냥 그 배에 있도록 해라.”

85일째 노인은 혼자 바다에 묵묵히 나간다.
어제는 그의 죽은 아내에 관한 꿈도 꾸지 않았다. 먼가 큰 대어를 낚을 듯하다.
노인은 항상 바다를 여성으로 생각했고, 큰 혜택을 베풀 수도 있고 베풀기를 거부할 수 있는 존재로 생각했다.
망망대해를 혼자 배에서 큰 꿈을 안고 고독과 인내의 시간을 보낸 노인의 정어리 미끼에 18피트(5.5m)의 엄청난 크기의 청새치가 입집을 한다.
“그 애와 함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도움도 받고 이걸 보여줄 수도 있었을 텐데.”
드디어 청새치가 미끼를 물었다. 엄청난 힘의 청새치는 노인의 작은 배를 끌고 점점 육지와 멀어진다.
이제부터는 노인과 청새치와의 인고의 싸움이다.
노인은 청새치와 씨름을 하느라 손에 쥐가 나고 낚시줄에 얼굴이 찢겨 피가 난다.
저녁이 되고, 다음날이 밝아 올동안 노인과 청새치는 엄청난 사투를 벌인다.
노인은 거의 실신 직전이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희망은 없었으나 단오한 결의와 완전한 악의를 가지고 결국 청새치를 배 끝쪽에 끓어 올리려 하지만 바다에 반 정도 잠겨있다. 사투를 벌인 청새치의 피는 상어들의 미각을 자극한다.
상어들은 어렵게 잡은 청새치의 살점을 뜯어먹으면 계속 노인을 괴롭힌다. 노인도 상어를 있는 힘껏 매번 막아본다. 하지만 역부족이다. 점점 기력이 빠진다.
살점이 떨어져 나간 청새치는 점점 가벼워진다. 하지만 노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나진 않았어, 인간은 파괴되어 죽을 수는 있지만, 패배할 수는 없어!”
노인은 조금씩 희망을 되살린다. 하지만 노인은 이제 숨을 쉬기 조차 어려웠다. 그리고 또 그는 입속에서 이상한 맛이 느껴지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그것을 뺃었다.
상어들의 공격을 받은 거대한 청새치는 이제 머리와 꼬리 그리고 뼈밖에 남지 않았다.
그는 이제 드디어 그가 패배한 것을 알았다.
육지의 항구가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노인은 지쳤다.
그는 돛대를 내리고 돞을 말아서 묶었다. 그때서야 그는 그가 얼마나 지쳐 있는가를 비로소 알았다.
그는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배를 돌아다봤다. 거리에서 반사되는 불빛으로 그는 청새치의 헐벗은 흰 등뼈의 선을 보았고, 끝이 뾰족한 입이 달린 거대한 검은 머리, 그리고 그 사이의 모든 헐벗음을 봤다.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그의 오두막집에 도착하자마자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바로 엎드린 채로 잠이 들어 버렸다.
소년은 매일 아침 그랬듯이 노인의 오두막집으로 갔다.
소년은 노인이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노인의 손을 보고 울기 시작했다.
그는 아주 조용히 방을 나와 노인을 위해 먹을 것을 가져오려고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길을 걷는 동안 소년은 계속 울었다.
소년은 따뜻한 우유와 설탕을 챙기며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사람들 보고 산티아고 할아버지를 귀찮게 굴지 말가고 일러주세요.”
소년은 따뜻한 우유와 커피를 노인의 오두막집까지 가져갔다.
노인이 눈을 뜰 때까지 그의 곁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늙은이가 눈을 떴다.
“일어나지 말고 그냥 계세요, 이걸 마셔요.”
노인은 그것을 받아서 마시고 이야기했다.
“그들이 나를 패배시켰단다, 마놀린. 완전히 패배시켰어.”
“물고기가 그런 건 아니에요? 그렇죠?”
“그건 아니야, 절대로, 내 패배는 그 후에 왔어.”
노인이 말했다. 그는 자기 자신과 바다만을 상대로 말하는 대신, 누군가 사람을 상대하고 말한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가를 느꼈다.

“네가 보고 싶었다.”
노인이 말했다.

“이제 우린 다시 같이 나가는 거예요.”
소년이 말했다.

소년은 오두막집에서 나와 낡은 산책로를 걸으면서 또다시 울었다.
노인은 또다시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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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헤밍웨이에게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을 동시에 가져다준 작품 ‘노인과 바다’는 노인과 바다 그리고 청새치에 대한 이야기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다.
나는 노인과 소년의 감정에 집중했고, 말미에는 왠지 모를 감정에 코끝에 찡함이 느껴져 눈물이 차올랐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소년의 울음이 무엇인지 의미하는지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나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고 걱정해 주는 사람은 누굴까?
나에게 소년 같은 사람은 엄마다.

그래서 엄마는 엄마가 세상에 없어도 엄마를 대신해 나를 지켜주고 걱정해 주고 진심으로 생각해 주는 짝이나 자식을 그토록 원하는 것이다.

엄마는 소년이며 노인이며 바다이다.

George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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