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삼각형
개인적으로 사람의 관상을 믿지 않는다.
나는 사람의 표정과 믿는다. 표정은 숨길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그 사람이 말할 때 눈빛과 입술의 움직임과 말하는 목소리의 울림을 느낀다. 눈빛 입술의 움직임, 목소리의 울림 그 세 가지가 진심으로 어우러지면 황금의 삼각형 구도가 완성되고, 진심 어린 소통의 몰입에 빠진다. 그러기에 거울처럼 마주한 사람이 가짜이거나 가짜를 얘기할 때 표정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면 거짓을 캐치하기가 수월하다.
‘슬픔의 삼각형’이란 영화에서 총괄감독이 남자주인공 모델 칼에게 주문한다. 표정에서 ‘슬픔의 삼각형’으로 빼라고. 극에서 나오지만 그의 표정에는 잘 나가는 인플루언서인 여자친구 모델 야야에 대한 시기심과 모델사회에서 하이레벨로 인정받지 못한 자격지심등 자신의 일에 대한 굉장한 열정은 찾아볼 수 없는 약간의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일관한다.
칼의 ‘슬픔의 삼각형’ 표정의 정점은 영화 포스터에도 나오는 호화 크루즈선 선베드에서 여자친구 야야와 나란히 누워 있는 씬에서 구현된다. 구릿빛 몸매의 남자선원에게 밝은 인사를 건네는 야야의 표정과 대비를 이루어 칼은 섹시한 구릿빛 몸매의 남자선원에게 질투와 시기를 느끼며 불만족스러운 감정으로 미간을 좁혀 ‘슬픔의 삼각형’ 표정을 짓는다. 더불어 지속적으로 자신의 썬배드 근처에 날아다니는 신경 쓰이는 똥파리와 똥파리 날갯짓 사운드와 함께 짜증을 불러일으켜 ‘슬픔의 삼각형’ 표정을 증폭시킨다.
누군가를 일대일로 대면할 때 우리는 나이가 들고 더 세속적으로 살게 되며 이유나 목적이 있어 사람을 만나는 경향이 더 많아진다.
나와 타인이 서로 다른 점이며 만나는 이유나 목적이 다른 한 점이 되어 세 점을 연결하면 드디어 삼각형을 이룬다. 목적이 있는 만남은 그 목적이 쌍방으로 충족되지 않을 때 ‘슬픔의 삼각형’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만남으로 인해 ‘기쁨의 삼각형’을 기대한 우리는 실망하고 심하면 관계를 단절하고 무너뜨리기도 한다.
이 같은 목적이 있는 '삼각형형의 만남'에는 내가 원하는 욕망이나 목적을 얻어내야 한다. 상대방에게 나의 목적과 욕망을 들키지 않고 얻어내는 일은 엄청난 기술과 연기력이 요구된다. 한편으로는 노동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영화에서 에비게일(캡틴)과 야야가 남자 칼을 함께 소유한다고 볼 수도 있고 칼을 물물교환의 대상으로 볼 수도 있다. 에비게일, 칼, 야야 이 세명의 인물도 슬픔의 삼각형’ 구도이다.
그래서 관계는 슬프다.
특히 목적이 있는 관계는 슬프다.
사적으로는 목적이 없는 만남을 좋아한다.
이유 없이 그냥 갑자기 그냥 친구나 애인에게 전화를 걸고 그냥 만나자고 한다.
만나서 대충 그냥 메뉴를 정하고 두서없는 쓸데없는 목적 없는 말들이 테이블에서 난무한다.
기대와 목적이 없으니 슬픔의 감정이 끼어들 공간이 없다.
아들러의 심리학의 핵심적 주장 중 하나는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온다’라고 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타인과의 관계에서 어려움을 느끼고, 그 어려움들이 곧 고민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나냐는 나를 즐겁게도, 기쁘게도, 안정되게도, 지적 자극을 받기도, 위로와 해소가 되기도, 편안하기도 한다.
또한 어떤 사람은 나를 슬프게도, 화나게도, 불안하게도, 근심이 생기게도, 무력감을 느끼게도 한다.
전자는 진정한 사랑과 우정의 관계이고, 후자는 불안과 자극의 관계이다.
관계에서 중요한 건 새로운 인연을 늘리는 게 아니고,
변함없이 내 곁에 머물러 주는 사람들에게 소홀해지지 않는 것이다.
인간은 새로움과 설렘에 본능적으로 끌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기대와 실수를 반복한다.
하지만 변함없이 내 곁에 머물러 주는 사람이 갑자기 떠나면,
우리에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커다란 상실의 아픔이 밀려온다.
George 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