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이갈리아의 딸들’ 비평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것들에 대하여

by 조지조


열성과 우성이라는 개념을 처음 배웠을 때, 나는 그것이 생물 시간에만 필요한 단어인 줄 알았다.


그때는 몰랐다.

이 단어들이 생각보다 사회적인 의미를 오래 끌고 올 줄은.




최근에 다시 본 영화 가타카는 유전자에 따라 인생의 상한선이 정해지는 사회를 그린다.

태어나기 전부터 ‘당신은 심장병 확률 99%’ ‘기대수명 30세’라는 딱지가 붙는다.

영화 속 사회는 능력주의를 말하지만, 실제로는 유전자주의다.

주인공은 말한다.

나는 부족한 유전자를 가졌지만, 그것이 나의 한계일 필요는 없다고.

그 말이 멋지게 들리는 이유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 역시 그렇게 공정하지 않다는 걸.


가타카의 세계에서는 피 한 방울, 머리카락 하나가 인생을 결정한다.

현실의 우리는 조금 더 단순하다.

서류, 얼굴, 말투, 그리고 성별. 그리고 여기서부터 이상하게도 나는 자주 안전한 쪽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는 남자로 태어났다.

선택하지 않았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 사실 하나로 한국 사회에서 나는 꽤 많은 우성 형질을 자동으로 부여받았다.


가타카에서 유전자는 능력의 예측 지표였다.

한국 사회에서 성별은 가능성의 예측 지표에 가깝다.

남성이라는 성은 마치 우성 유전자처럼 작동한다.

특별히 뛰어나지 않아도 일단 가능성은 있다는 전제가 붙는다.

나는 그 전제를 너무 자연스럽게 누려왔다.


이 사회는 정말 능력 중심일까?

아니면 성별이라는 유전형질에 너무 많은 가산점을 주고 있는 건 아닐까?

가타카의 세계가 유전자를 맹신해서 무너졌듯,

우리는 성별을 맹신하면서 이미 불공정해진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40년 전 북유럽 노르웨이 소설 ‘이갈리아의 딸뜰’을 통해 사유하게 한다.


그래서 요즘 나는 이렇게 질문하고 나를 성찰해 본다.

내가 누려온 많은 ‘기회’는 정말 나의 능력이었을까,

아니면 남성이라는 우성 형질 덕분이었을까?


이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나는 여전히 꽤 많은 혜택을 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태어나 지금까지 누린 혜택에 감사하고


겸손하게 하루하루를 충만히 살아가야 한다.


George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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