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반스 소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비평

받아들임(Acceptance)과 수용, 포용(Embrace)

by 조지조




어떤 이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줄리언 반스 소설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Elizabeth Finch)’은 위 질문에 명확한 답을 주진 않지만,

받아들임(Acceptance or embrace) 또는 인간에 대한 수용 또는 포용에 대한 통찰은 선명해진다.


스토아 철학, 기독교, 인생과 이해 그리고 사랑이란 명제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이 소설은, 주인공이 우연히 엘리자베스 핀치라는 교수의 강의를 듣게 되고 매료된다. 그녀의 삶의 자세는 어딘가 모르게 고대 스토아 철학과 닮아 있고 늘 미완성인 삶만 살던 나는 그녀의 단단하고 지적인 태도에 끌리게 된다.

그녀와 주인공은 스승과 제자를 20년간 1년에 몇 번씩 점심 식사를 하게 되지만, 성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질문과 대답이 함께하는 사이었으나,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은 엘리자베스 핀치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EF(엘리자베스 핀치)는 스토아 철학적인 사람으로 등장한다.

스토아 철학은 기원전 3세기 제논이 창시한 헬레니즘 철학을 기반으로, 이성을 통해 정념(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내적 평온)과 도덕적 덕을 추구하는 사상이며, 인생의 짧음과 내적 안정을 강조한 최근 많이 회자되는 ‘세네카’가 대표적인 스토아 철학자이다.

스토아 철학은 외부 환경으로 인해 불안을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감정을 제어하고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는 심리적 기법(인지행동치료의 기반)으로 주목받고 있다.


소설로 다시 돌아와 주인공은 EF의 과거의 삶의 조각들을 따라간다. 독자도 주인공도 그녀의 삶의 조각들로 신비롭고 묘한 그녀의 사적인 삶의 궤적과 퍼즐을 맞출 기대를 가지고 계속 나아간다. 하지만 독자와 주인공에 주어진 과제 같은 퍼즐의 완성은 선명해질수록 희미해지는 진실의 아이러니 앞에 허둥대며 좌절한다.


우리는 엘리자베스 핀치를 얼마나 알게 되었을까?

2장의 율리아누스 황제를 빗대에 작가는 우리에게 힌트를 준다.


제2장,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를 경유해 엘리자베스 핀치를 해석하려는 시도는, 역사적 인물의 사상과 행위를 해석하는 방식이 지닌 해석학적 한계를 스스로 폭로하는 지점에 이른다. 율리아누스는 기독교적 필연성의 서사에서 이탈하여 고전적 이성의 복원을 꿈꾸었으나, 그의 선택은 언제나 ‘배교’라는 단일한 표식으로 환원되어 왔다. 여기서 역사는 사실의 축적이 아니라 관점의 정치학이 되며, 해석은 진실에 접근하기보다 의미를 점유하는 행위로 전락한다.


엘리자베스 핀치를 율리아누스를 통해 이해하려는 독해 역시 동일한 오류를 반복한다. 그녀의 사유는 일관된 교리나 도덕적 체계로 포획되지 않으며, 오히려 우연성과 모순을 견인력으로 삼아 사유를 전진시키는 방식에 가깝다. 따라서 역사적 인물의 사례를 통해 그녀를 규정하려는 욕망은, EF의 사유가 지닌 비결정성과 개방성을 거세하는 폭력적 단순화에 불과하다. 줄리언 반스가 제시하는 것은 역사적 유비의 가능성이 아니라, 그러한 유비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인식이다.


결국 율리아누스는 핀치를 설명하는 열쇠가 아니라, 설명하려는 충동 그 자체의 허망함을 드러내는 거울이다. 역사는 해석될 수 있으나 소유될 수 없고, 사유는 이해될 수 있으나 완결될 수 없다. 엘리자베스 핀치를 역사적 해석의 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결론은, 그녀가 불투명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정직하게 사유의 불완전성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스의 또 다른 소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유명한 문장 ‘역사는 불충분한 문서와 부정확한 기억이 만나는 지점에서 빚어지는 확신’이라는 말에서 분화된 견지로 보인다. 이 지점에서 반스는 독자에게 해석의 오만을 경계하라고, 그리고 이해하지 못함을 견디는 지적 윤리를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첫 질문으로 돌아와서,


우리는 어떤 이를 그리고 어떤 이의 과거와 역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


고전소설과 인문학을 읽으며, 인간에 대한 이해를 목표로 삼은 적이 있다.

스스로에게 자책한다. 얼마나 오만하였는가?

이해보다는 받아들임, 이해가 되지 않아도 받아들이는 자세 즉, 수용과 포용이란 단어로 다시 돌아간다.

그것이 사랑이다.

영화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에서 세라가 벤을 받아들인 것(Acceptance)의 무조건적인 수용과 포용의 고귀함을 잊고 있었다.

인간은 소설의 주인공이나 EF처럼 모두가 미완성의 작품이다.

조건이 아닌 존재 그 자체이다.

조건은 이해이고 존재는 포용이다.


역사와 인간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며,


받아들임(Acceptance ) or embrace)과 수용, 포용의 존재이다.


인간은 조건이 아닌 존재로써 증명된다.


삶이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George 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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