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세 살이 되던 그 해 여름. 엄마의 자랑스러운 아들이 엄마를 울리고 말았다. 울지 않으려 온갖 힘을 써 눈물을 참는 엄마의 눈가에 생긴 웅덩이는 결국 홍수가 나고 말았다.
게이로서의 나를 완전히 받아들인 지금과 달리 나는 나를 인정하지 못하던 기간이 정말 길었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를 혐오하던 시간이 길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15살, 처음으로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괴물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이후 이 생각은 나를 오랫동안 괴롭혔다. 나의 부정기간은 10년이나 지속되었고 25살이 되어서야 나를 완전히 인정할 수 있었다. 지금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 사이에 벌어진 이야기다.
군복무 중일 때, 나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휴가 도중 동아리 모임에 나가게 된 나는 유난히 나를 따르는 여자 후배를 만나게 된다. 그 후배는 해당 기수에서 가장 예쁘기로 소문이 났던 친구였다. 모든 사람에게 살갑고 마음씨가 고왔던 그녀는 예쁜 얼굴만큼이나 착한 성격으로 동아리 내에 유명인사였다. 나와 처음 보는 자리에서도 거침없이 질문을 던지고 대화를 이끌어 나가던 그녀가 같이 셀카를 찍자고 요청했을 때 나는 그녀의 당돌함에 매료되었다. 시커먼 남자들만 잔뜩 있던 부대를 나와 ‘오빠, 오빠’하며 살갑게 굴던 예쁜 여자 후배가 나에게 관심을 보이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나는 적극적인 그녀에게 넘어가주기로 했다. 그렇게 나에게 적극 대시를 해오던 그녀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귀게 되었다. 처음엔 마냥 모든 게 좋았다. 예쁜 여자와 사귄다는 사실은 마치 내가 더 멋진 남자가 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고, 의경으로 복무했던 나에게 매주 외출마다 즐기는 데이트는 쓰디쓴 군대 생활 중 공원에서 맛보는 달콤한 솜사탕 같았다. 그렇게 그녀와의 시간이 하루씩 쌓여가고 있었다.
그녀와 사귄 지 두 달 즈음, 나는 점점 변해가는 나를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데이트가 즐겁긴 했지만 점점 그녀를 만나는 일이 숙제처럼 느껴졌다. 그녀와 손을 잡고 뽀뽀를 하는 순간은 좋았지만 그녀를 탐하고 싶지는 않았다. 전화통화 중 보고 싶다고 말하는 그녀의 말에 ‘나도’라고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하는 나를 발견할 때도 있었다.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나는 그녀가 아닌 여자를 좋아하는 나의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죄책감과 여자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동시에 꽃 피워 나를 괴롭혔다. 그렇게 점점 나는 이 관계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왔다. 매일 새벽 4시, 부모님은 새벽 예배를 다녀오시고, 새벽 예배가 끝나서 집에 돌아오면 아침 6시에 온 가족이 함께 아침식사를 해야 했다. 그녀는 아침식사 시간에 일어나야 했기 때문에 항상 10시 전에 귀가해야 했다. 보통의 남자라면 10시 이전에 귀가하는 여자친구가 아쉬웠겠지만 나는 다행이라고 느꼈다. 나는 10시 이후에 그녀가 원하는 걸 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그녀는 나와 데이트를 할 때면 항상 긴장하고 있었다. 내가 동아리 활동을 하던 시절, 나는 본의 아니게 동아리에서 유명했었다. 나는 동아리에서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었고, 모든 사람들과 막역하게 잘 지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귀여움과 사랑을 받는 동아리원이었다. 나에 대한 평판을 익히 들어온 그녀의 머릿속엔 내가 멋진 선배로 자리하고 있었나 보다. 그녀는 나와 연인 관계인 본인이 나에 비해 어딘가 부족하진 않은지 항상 자기에 대한 의심을 지우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나와의 데이트에서 항상 필요 이상으로 긴장 상태였다. 데이트를 할 때면 항상 과하게 꾸미고 나오는 그녀를 볼 수 있었고, 그녀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엄청나게 신경을 쓰곤 했었다. 그녀는 나와 있을 때 그녀답지 못했다.
나는 관심사가 많은 사람이었다. 평소 즐기던 취미가 5개는 넘었고, 사람들과 친해질 때도 다양한 관심사 덕에 누구나와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그녀는 나의 다양한 관심사를 항상 필요 이상으로 좋게 평가했다. 나와는 다르게 취미와 관심사가 많지 않던 그녀는 나를 멋진 사람으로 추켜세우며 자신을 낮추는 일도 많았다. 그녀에게 취미가 뭔지 물었던 날 그녀는 끝끝내 대답을 하지 못했고 대답을 하지 못한 자신을 자책했다. 항상 긴장하던 그녀는 나와의 만남에서 점점 자신감까지 잃게 되었다.
그녀와의 100일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 데이트 중 문뜩 부대로 복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대에는 내가 입대할 때 첫눈에 반했던 선임이 있었다. 그녀와 보내는 시간 중 나는 그를 떠올리곤 했다. 부대에 가서 그 선임과 같이 떠들고, 매점에 가고, 담배를 피우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상상을 했다. 이런 나를 깨달을 때면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자친구와 시간을 보내는 동안 다른 사람을 상상하는 나를 용서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 대상이 여자가 아닌 남자라는 사실은 나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나의 마음이 어떤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나와 더 긴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 했던 그녀의 사랑이 점점 부담감과 부채감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 상황에서 그녀를 옆에 두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괴로웠다. 괴로움이 커지면서 그녀에 대한 마음은 더욱 작아졌다. 그녀를 향한 나의 마음이 작아짐에 따라 그녀는 그 원인을 자기 안에서 찾으려 애를 썼다. 그런 그녀에게 미안함까지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관계가 나에게도 그녀에게도 건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녀와의 만남을 지속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 건강하지 않은 관계를, 나와 그녀의 괴로움을 끊어야 했다. 관계는 항상 그렇다. 더 좋아하는 쪽이 덜 좋아하는 쪽에게 별 수 없이 지게 된다. 그렇게 나는 그녀에게 이별을 말하고 그녀는 나에게 별 수없이 져버렸다. 그녀는 펑펑 울며 나를 붙잡았다. 그녀가 울면서 말했다. “내가 한참을 생각해 봤는데, 나도 취미가 있었어. 나는 재미없는 사람이 아니야. 나는 집에서 피아노 치는 걸 좋아해. 그리고 친구들이랑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는 것도 좋아하고….” 나를 향해 본인을 증명하려는 그녀의 울부짖음에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녀가 나를 붙잡을 때마저도 나는 부대 선임을 떠올렸으니 그녀는 얼마나 비참했을까.
그 시점 나는 부대에서 징계를 받게 되었다. 정확한 이유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징계 처분으로 한 달간의 외출 정지를 선고받았다. 모든 부대원들이 떠난 부대 안은 외롭고 심심했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면회를 부탁했다. 가족이 찾아오는 면회 시에는 식사시간을 포함 3시간의 면회 외출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녀와의 관계 정리와 내 성적 지향으로 머리가 복잡해진 나는 어떻게든 이 부대 안을 벗어나 머리를 식히고 싶었다. 엄마가 면회를 왔다. 부대 근처에 내가 좋아하는 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카페로 이동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너 여자친구랑은 잘 지내니?” 엄마가 물었다. “아니 얼마 전에 헤어졌어.” 나는 하필이면 이 시점에 이런 질문을 하는 엄마가 미웠다. “왜 헤어졌는데?” “그냥 내가 걔가 별로 좋지 않은 것 같더라고.” 엄마는 내 대답을 듣고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한참을 아무 말이 없었다. 침묵을 깨고 엄마가 나에게 던진 말, “너가 여자가 좋지 않은 건 아니고?” 엄마는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꺼냈지만 이십여 년간 같이 지낸 엄마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알아채기는 쉬웠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미 머릿속이 폭발 직전이었던 나는 엄마의 직구를 어떻게 받아쳐야 할지 고민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냥 모든 걸 내려놓고 싶었다. 몇 년간 해오던 거짓말이 귀찮아졌다. 머릿속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
그 땡글한 엄마의 두 눈이 얇게 흔들리며 눈 사이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엄마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했지만, 20년 넘게 키워온 아들이 게이임을 알게 되는 순간 정신이 온전하기는 쉽지 않았으리라. 엄마는 다음 말을 꾹 참은 채 그저 말갛게 차오르는 눈물을 눈에서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엄마의 자랑스러운 아들은 말 한마디로 엄마를 무너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