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을 주는] 엄마

by 온리원

자녀에 대한 걱정과 불안은
언제나 나를 아이들 곁으로 더 바짝 끌어당긴다.
그 마음은 곧 통제와 간섭으로 모습을 바꾼다.


친구 관계, 학교생활, 학습과 진로, 생활 습관까지.
전적으로 아이를 믿고 맡기겠다고 다짐하지만
조금이라도 내 기준에서 벗어나는 순간,

나의 통제 센서는 어김없이 작동하고 만다.

“누구랑, 어디서, 뭐 하고 놀 건데?”
“그래서 몇 시에 들어와?”
“수학 문제집은 풀었니?”


특별한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남들 다 하는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길 바랄 뿐이다.
하지만 다른 부모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내 육아와 교육 방식이 평균에서 벗어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더 불안해지고, 더 조급해지는 걸까.
자율성을 존중한다고 말하면서도
자꾸만 확인하고 통제하려는 나를 발견한다.


사실 나는 원래 계획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이십 대 중반, 첫 직장에 대한 실망을 안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며 처음으로 플래너를 썼다.
시험일을 기준으로 역순으로 계획을 세우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공부량을 요일별로 나누었다.
주말에는 여유를 남겨 두었다.
그 나름의 전략은
‘단기간 합격’이라는 결과로 돌아왔다.


공직 생활의 매너리즘 속에서
결혼과 출산, 양육이라는 삶의 무게까지 더해지자
삶이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때 후배의 권유로 자기계발 특강을 듣고
커뮤니티 활동을 시작하며
바닥까지 떨어졌던 나의 열정에 다시 불이 붙었다.
나의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삶을 설계하고 싶어졌다.


미라클 모닝, 독서, 운동, 명상.
그동안 소홀히 했던 일들을 하나씩 습관으로 만들었다.
일과 육아를 병행해야 했기에
시간을 쪼개 쓰는 수밖에 없었고,
플래너를 시간 단위로 작성하며 하루를 채워 나갔다.
몸은 피곤했지만
매일 조금씩 성장하는 나 자신이 기특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도 이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자연스레 생겼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폴 부르제의 이 문장은 유독 내 마음에 깊이 남았다.
나는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지만
아이들만큼은 가능성을 일찍 알아봐 주고 싶었다.


그 마음은 곧 욕심이 되었다.
나의 경험과 방식이 아이들에게도 정답이길 바랐고,
계획적인 삶을 살기를 은근히 강요하며
그들의 방식을 통제하려 했다.
내가 낳고 키웠지만
아이들은 분명 나와 다른 존재인데 말이다.


휴대폰 사용 시간을 정하고,
하루에 풀어야 할 문제집 분량을 정해 확인하며
큰아이와 잦은 갈등을 겪었다.
그렇다고 결과가 좋아진 것도 아니었다.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영어와 수학 점수를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마음을 내려놓게 되었다.


‘그래, 이제는 네가 스스로 해 봐라.’


늘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고 말하던 아들의 말을
처음으로 그대로 믿어 보기로 했다.


완전히 내려놓은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신경은 쓰였고,
참아야 하는 순간도 많았다.
하지만 자율을 주기로 했으니
통제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먼저 영어 학원을 다니고 싶다고 말했다.
스스로 필요성을 느끼고 내린 결정이었다.
일주일쯤 지나서는
“학원 다니길 잘한 것 같아. 수업이 훨씬 편해.”라고 했다.


그제야 알았다.
믿는다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기다려 주는 일이라는 것을.


자율을 주는 엄마가 되기 위해
나는 오늘도 나의 마음을 먼저 다스린다.


아이의 입장이 되어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스스로 계획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며,
그 선택의 결과까지 존중해 주는 것.


아직은 서툴고,
여전히 불안이 먼저 앞서지만
조금씩 배워 가고 싶다.


아이의 삶을 대신 살아 주는 엄마가 아니라
아이의 삶을 믿어 주는 엄마로.


그것이
내가 되고 싶은
[자율을 주는] 엄마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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