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과자 봉지들 다 뭐야?
쓰레기 버리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이야?
도대체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책상 위며 침대 헤드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과자 봉지들이
순식간에 나의 화를 돋웠다.
정말 별것 아닌 일인데,
왜 그렇게까지 크게 화가 났을까.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이 존중받지 못했다고 느낄 때,
다시 말해 무시당했다고 여겨질 때
강하게 자극을 받는다.
그에 대한 반응으로 화를 내는 사람도 있고,
아무 말 없이 넘기거나 조용히 상처를 감내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상대가 나를 존중하지 않는다고 느낄 때,
나의 반응은 상대에 따라 달랐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어차피 다시 볼 일이 없다는 생각으로
별 타격 없이 무시했고,
사회생활로 어쩔 수 없이 계속 만나야 하는 사람에게는
적당한 거리 두기로 마음을 정리했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존재,
특히 가족, 그중에서도 약자인 아이들에게는
유독 화를 냈다.
내가 지시한 일을 미루거나 하지 않을 때,
한 번 지적한 잘못을 두세 번 반복할 때,
주로 언성이 높아졌고 감정이 격해졌다.
아마도
‘내가 무시당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서였을 것이다.
존중받지 못했다는 감각이
나를 그렇게 자극했던 것이다.
그런데
내 화를 고스란히 받아내야 했던
아이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니
아이들 역시 충분히
존중받지 못한다고 느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존중’이란
상대를 함부로 대하지 않고 정중하게 대하는 것,
귀하고 소중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다.
과연 나는 아이들을
정말로 귀중한 존재로 대하고 있었을까?
열 달 동안 품고 배 아파 낳은 자식이니
귀한 존재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그러나
‘귀하게 대했는가’에 대해서는
솔직히 자신할 수 없다.
어쩌면 아이들을
나의 소유물처럼 여기며
함부로 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민규의 『생각의 각도』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가족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끔 가족을 ‘귀한 손님처럼’ 여기는 것이다.
우리 곁에 잠시 머물다 곧 떠날 손님,
한 번 떠나면 다시는 못 만날 귀한 손님처럼 바라보면
모든 것이 다르게 느껴진다.
가장 편하고,
그래서 가장 함부로 대하기 쉬운 존재인 가족을
‘귀한 손님처럼’ 대하라는 말이
이제야 마음 깊이 와 닿는다.
아이의 실수 앞에서
내 말이 무시당했다고 느끼기 전에
‘나는 지금 이 아이를 존중하고 있는가’를
먼저 묻고 싶다.
존중하는 엄마란,
완벽한 엄마가 아니라
아이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려 애쓰는 사람일 것이다.
오늘도 화가 나기 직전,
한 번 더 숨을 고르며
아이를 ‘귀한 손님’처럼 바라보려 한다.
아직은 서툴지만,
그 연습이 쌓여
언젠가는 아이의 마음에도
‘나는 존중받고 있다’는 기억으로 남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