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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명 Sep 07. 2020

반려(伴侶)의 지위

개와 고양이는 과연 우리의 반쪽이 될 수 있을까?

 ‘평생의 반려자’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필자는 주로 청첩장을 받을 때 상투적이라 할 수 있는 카드의 문구를 일일이 읽어보는 편인데, 거기에서 ‘반려자’라는 단어를 많이 보아왔다. 반려(伴侶)의 한자는 ‘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평생의 동반자 내지 짝이라는 뜻으로 배우자의 대용어로 쓰이지만 일상생활 즉 우리의 대화 가운데에서 ‘반려자’라는 말은 들어보기 힘들다. ‘반려’라는 단어는 예전부터 있었지만 ‘반려견’은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고 약 십여년 전부터 우리사회에 전파되어 이제는 매우 흔하게 사용되는 일상어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이제 ‘반려묘’라는 용어도 일상화 되어가는 중인 것 같다. 

흰 눈이 세상에 덮였을 때 돌아다니는 백구 새끼들을 찾아내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별히 반려견이나 반려묘(통칭 반려동물)라는 새로운(?) 명칭이 불편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떻게 하여 배우자에게 사용하는 ‘반려’라는 최고급 한자어가 개와 고양이들에게 하사되었는지, 다시 말하면 ‘반려(伴侶)의 지위’를 언제 누가 이 동물들에게 부여하였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반려동물’ 이라는 용어는 198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인간과 애완동물의 관계」 라는 주제로 열린 심포지엄에서 처음 제안되었다고 한다. 기존 ‘애완’이라는 용어의 인간 중심적인 도구적 관점에서 탈피해 동물 역시 인간처럼 함께 살아가야 할 존재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필자가 생각하기에도 애완동물이라는 용어는 지나치게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표현하고 있기에 이러한 용어 개선에의 시도는 바람직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반론이 있을 수 있지만) 현재 최저임금의 급격한 상승이 여러 부작용을 일으키는 것과 같이 특히 우리나라에서 이들의 급격한 신분상승은 선작용이든 부작용이든 효과가 비교적 즉각적인 최저임금과는 다르게, 느리지만 부지불식간 되돌릴 수 없는 ‘관념과 인식의 충돌’을 야기할 수 있다고 본다.


 그 이유로 반려동물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미국의 경우, 집안에서 기르는 개와 고양이는 과거나 지금이나 그 용어는 ‘Pet’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은 이들의 애칭을 부르지만 대내외적으로 이들은 Dog 내지는 Pet 이라고 인식되고 있다. 미국인들의 관념 속에서 이들을 가축이 아닌 가족의 구성원으로 인식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고, 우리나라 또한 반려동물을 키우는 가정에서 이들을 가족으로 여기는 것은 동일하다.

하지만 명칭으로서 가족의 정식 구성원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부부 사이에서나 가능한 ‘반려’의 지위를 부여한 것은 적어도 필자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 


 사실 ‘반려’라는 용어의 등장은 그동안 동물학대에 둔감했던 우리 주위를 환기해보면 그리 놀랄 것도 아니다. 일방적인 인간 중심으로 개와 고양이 등 가축을 비윤리적으로 사육하여 왔고, 스트레스 해소와 재미를 목적으로 동물을 학대하여 온 일부 아니 상당수의 우리들 스스로에 대한 반성으로 동물복지가 등장하였던 것이다.

그동안의 학대를 철저히 보상하는 차원에서인지 이들은 본래 가축의 지위에서부터 우리의 친구로, 나아가 우리의 가족으로 급격히 신분이 상승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미국의 경우,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Pet’으로서 신분상승에의 여지가 크지 않았다. 반면 우리나라는 불과 일이십년 사이에 이들에 대한 용어가 애완동물에서 반려동물로 전격적으로 전환이 되었고, 우리들은 이 명칭에 걸맞는 지위를 인정하길 지속적으로 떠밀리듯 요청받고 있다. 개와 고양이를 인간과 거의 동등하게 아끼고 대우하는 것이 세련된 선진 문명인의 행동이고, 개와 고양이에 맞는 대우를 한다고 하는 사람은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몰상식한 사람이 되기 쉽다. 도대체 개와 고양이에 맞는 대우 내지 취급이 무엇인지 이제는 도저히 알 수 없게 되었지만, 반려동물이라는 명칭이 그러하니 명칭에 걸맞는 취급을 받아야 하는 것이 상식이고 일반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문제는 우리나라에서 이들의 신분상승에 동의하지 않는 무언의 반대자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반대자들은 작위(作爲)로써 신분상승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부작위(不作爲)로써 소리없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개와 고양이가 평생을 함께할 반려자 이겠지만, 분명 다른 누군가에게는 막 가축의 지위를 벗어난 그저 개와 고양이일 뿐인 것이다. 지위가 너무 높아진 나머지 개와 고양이라는 단어가 그들에 대한 명칭인 것이 분명한데, 그들의 주인들 아니 가족들에게 개와 고양이라는 말을 꺼내기가 주저하여 지는 이 현상을 어떡해야 할까?  

 필자는 지방출장을 종종 다니기 때문에 시골에서 길러지는 개들을 접할 기회가 많다. 이들은 분명 반려동물이 아닌, 확실하게 짐승 취급을 받고 있었다. 그 중에서는 식용견의 용도로 사육되어 지는 개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몸집이 큰 개들만을 대량으로 사육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시골개들을 접하는 빈도 보다는 적게 필자의 지인들을 통해 반려견의 모습을 직·간접적으로 보기도 한다. 필자는 지인들에게 결코 ‘개’ 라는 단어를 쓰지 않으며, 그들의 엄연한 이름을 부르면서 지인들과 그들의 취미나 건강, 추억에 관한 대화를 하고 있다.     마치 지인들의 부모님이나 배우자, 자녀들에 대한 안부를 묻는 것과 같다. 크게 다르지 않다.    

필자가 키웠던 백구 강아지... 강아지는 시골개가 참 예쁘다!

  필자는 동물들을 아끼고 사랑한다. 그 중에서 개와 고양이들을 특히 좋아한다. 직접 기르고 있기도 하고, 길러본 경험도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우리의 지인들처럼 서운하게도 안하고, 배신도 안하고 언제나 천사같이, 아니 모든 죄를 용서하신다는 하나님 같이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며 기뻐하며 환영해준다. 어릴 때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지만, 장성해서는 주로 서운하게만 하는 우리의 자녀들과는 다르게 어릴 때와 컸을 때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도 않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들과 함께 하고싶어 하고, 그들을 평생의 반려자로 여기며 살아가고 싶어하는 것 같다. 다 이해가 되고, 공감도 되지만 필자에게 ‘반려의 지위’ 만큼은 부모와 자녀에게도 부여할 수 없는 신성하고도 유일한 것이다. 

 오직 배우자에게만 허락되는 그 소중한 지위를 착한 동물이라 하여 줄 수는 없을 것이다. 


                                           

  인도에서는 소와 원숭이가 신성시 되어 이미 예전부터 인간 이상의 지위를 차지한 것 같다.   이 경우는 동물복지나 반려동물과는 다른 차원에서 접근된 현상인데, 어쨌거나 ‘동물팔자가 사람팔자 보다 낫다’라는 말이 충분히 나올 만 하다. 세상이 발전할수록 인간의 지위는 그대로 이든가 혹은 더 낮아진다는 느낌을 받는데, 반대되는 현상을 그들에게서 볼 수 있으니 심히 개운치 않음은 특정동물에 대한 인간들의 유치한 질투심일까? 


 아니면 만에 하나 인도의 소나 원숭이 같이 ‘반려의 지위’ 이상의 지위를 머지않아 그들이 향유할 지도 모른다는, 현실성 없는 상상에 대한 두려움일까?


 필자가 가지고 있는 감정도 질투심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가 없어 더 이상 할말이 없다.

필자가 3~4살 되었을 때  아버지와 반려견(?)과 함께... (격투기 초크 기술을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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