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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명 Nov 02. 2020

애프터 서비스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AS를 소개합니다!

  정확히 어느 시점인지도 알 수 없는 관념상의 ‘예전’보다는 확실히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무엇 하나 사려고 해도 알아보아야 할 정보들이 예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많다. 먼저 온라인 구입이냐 오프라인 구입이냐에 따라 구매전략(?)이 달라지고, 오프라인을 선택할 경우는 그렇다 쳐도 온라인 구입을 결정하는 순간부터 ‘외국계 컨설턴트 저리가라!’ 외치며 요소별 비교분석 작업이 시작된다. 동일·유사 모델별 가성비 비교, 판매 사이트별 가격차이, 배송비 포함유무 가격비교, 해외직구 여부, 구입후기 탐독 등 내가 CIA인지 국정원 요원인지, 겉으로만 볼 때의 나의 모습은 영락없이 영화 ‘미션 임파서블’의 주인공 이든 헌트 요원(톰 크루즈)이다.

 사실 나는 컴퓨터 마우스 하나를 사려는 것인데 말이다.


 어쨌든 이와같이 필요 이상으로 고도화된 구매방식을 완화시켜 주는 핵심기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애프터 서비스(AS)’ 이다. 어느 정도 기술이 집약된 공산품을 구매할 때 AS 여부와 편의성은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할 요소가 되었다. 덕분에 구매선택의 모래알 같은 경우의 수들이 손바닥에 올려놓은 도토리 개수만큼 줄어든다. 나는 이왕이면 우리나라 유명 브랜드의 제품이 AS가 편하다고 본다.

 또한 정 확히 어느 시점인지도 알 수 없는 ‘과거’와는 달리 지금 우리는 ‘평생 AS’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평생 AS라니, 이상하다. 아무리 유명 브랜드 제품도 길어야 3년 정도의 AS기간인데, 평생 AS는 어떤 제품을 말하는 것인가? 바로 ‘자식’이라는 제품이다.

 필자도 딸 하나를 키우고 있기에 앞으로 듣게 될 말을 짐작할 수 있다. ‘이제 다 키웠네’, ‘시집보내도 되겠어’... 이러한 말들의 속뜻은 ‘이제 애한테 신경을 덜 쓰게, 혹은 안쓰게 되었다’일 것이다. 살짝 해방감과 자유를 느끼라는 말일 것이다. 앞으로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듣고 나도 모르게 흐뭇해할 내 모습을 떠올려 본다. 하지만 이건 착각이자 착오이다. 정말 심각한 오해가 아닐 수 없다. 

 우리 부부는 아무래도 숨이 멎는 순간까지 딸을 생각할 것이다. 그 순간에는 친한 친구가 떠오르지도 않을 것이고, 존경하는 은사님이 떠오를 것 같지도 않고, 자식은 아니지만 자식과 다름없는 반려동물이 걱정되지도 않을 것이 분명하다.

 필자는 누군가 부정적인 이미지를 부여하기 쉬운 부모의 자녀에 대한 ‘평생 AS’에 대하여 가치판단을 하고 싶진 않다. 맞고 틀리건 간에, 좋고 나쁘건 간에 이것은 정답을 낸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어떤 경우에나 우리 부부는 평생 AS 사원으로 이미 임명을 받았다. 임명권자도 부모인 우리 자신들이다.

 널리 알려진, 인간과 동물과의 구분을 ‘도구를 만들어 사용할 줄 아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에 필자는 더 이상 동의하지 않는다. 어설프긴 하지만 몇몇 동물들이 도구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이 되었고,  ‘도구사용’에의 구별기준은 세상에서 주장된 지 너무 오래 되었다. 현대상황에 맞도록 업데이트 된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는 기준은 ‘부모가 평생 AS를 해주는가’ 라고 생각한다. 특히 고도화된 도시사회에 있어서 많은 부모들이 출가한 아들과 딸의 의식주를 여러 방식으로 지원하고 있다. 마치 기업마다 존재하는 경영지원본부와 같이 출가한 자녀의 부모들은 ‘자녀지원본부’가 되어 자신의 업무를 자발적이고도 기쁘게 수행하고 있다. 오히려 자녀지원본부의 구성원은 휴가를 내는 것을 꺼려한다. 조기출근은 물론이고 야근과 숙직·당직까지 그들에게 근로기준법이란, 지구 반대편 나라에 사는 고양이 이름처럼 여겨질 뿐이다.


  자녀의 성별에 따라 부모가 지원을 요구받는 방식도 특징을 보인다. 아들에 비해 섬세하고 아기자기한 딸들은 친정에서 이것저것 다양하고 속속들이 수시로 가지고 간다. ‘엄마! 이거 써? 안쓰면 내가 갖고갈게~’ 라고 말하며 ‘엄마’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무슨 생각으로 가지고 왔는지 자기집에서 가지고 온 큰 장바구니에 쑤셔 넣는다. 이미 쑤셔 넣었으니 ‘엄마’는 쓴다고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딸 한번 친정에 왔다가면 남아남는 것이 없다’라는 옛말이 있는 것 같다. 반대로 아들은 자잘한 것 챙기는 것을 귀찮아 한다. 대신 회사일이 힘들거나 미래가 불안할 때 ‘나 사업이나 할까?’ 라며 걱정되는 말을 지나가듯 하다가 어느날 갑자기 긴장한 듯 굳은 표정으로 와서는 ‘사업할 테니 돈 좀 지원해 달라’고 한다. 물론 그 돈의 액수는 결코 적지 않다. 안타깝지만 그 ‘사업이나’는 약속이나 한 듯 언제나 아들의 뜻대로 되지 않아 원금소진, 아니 원금탕진에 신속하다. 그리 오래지 않아 다시 찾아온 아들은 첫 번째 보다 더욱 비장해진 표정으로 이번에는 며느리와 함께 나란히 무릎까지 꿇으면서 ‘다시 사업을 해서 꼭 재기하겠다고’, ‘몇 배를 더 안겨드려 호강시켜 드리겠다고’ 부모의 남은 돈이나, 남은 돈이 없으면 부모가 사는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사업자금을 마련한다. 이 아들이 외동아들이 아니라면 자연히 다른 형제자매들은 아들을 괘씸히 여겨 우리나라 대표적 미풍양속인 형제간 다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물론 부모님을 걱정시켜 드린 것에 대한 갈등이 아닌, 유산이 될 수 있는 재산을 선점하여 가로챘다는 괘씸함에 그 동기가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다. 신기하게도 나이 40대에만 접어들어도 기억력 감퇴를 호소하면서 십몇년 전 형수, 올케, 동서, 처제, 도련님이 했던 말과 행동을 토시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해 내어 말싸움 때마다 전체 동원령을 소집하는 병법(兵法)은 손자(孫子)나 제갈량도 따라오지 못할 정도이다. 이쯤되면 딸보다 아들이 더 무서운 것 같은데, 일반적으로 이런 성향이 있다는 것이지 현실에서는 아들, 딸 마찬가지일 것이다. 다만 각각의 특징을 분석해 본다면 아들은 특유의 비장함과 엄숙함으로 부모의 마음을 긴장시킨 후 본론으로 들어가고, 딸은 특유의 상냥함과 애교, 친절함으로 부모의 마음을 완화시킨 다음 본론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전략은 자식들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에게 ‘모성애’가 있듯이 자녀들에게도 그들이 더 잘 살아갈 수 있는 태생적인 전략이 있는 것이다. 그 뒤의 레퍼토리도 다들 알기에 굳이 더 언급을 하지 않겠다.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이런 식으로 전 재산을 그들의 계획보다 훨씬 먼저 자식에게 준 부모는 나중에 배우자 한쪽이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되면 자식집을 눈치보며 전전하거나, 요양원에서 여생을 보내는 경우의 수 외에 무슨 다른 별수(別數)가 있을까? 아까 말했던 특히 고도화된 도시사회일수록 요양원의 수(數)에 당첨될 확률이 더 크며, 이러한 요양원은 그냥 ‘요양원’이라고 불리지는 않고, ‘프리미엄’이 앞에 붙거나 ‘실버 레지던스’라는 한글로 된 영문(?)모습의 기괴한 구조의 파생어인지 합성어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 간판을 달고 있다.    

 여기까지는 전통적인 ‘평생 AS’의 모습이었다. 위의 소재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이미 진이 빠져서 쓴 맛이 나도록 우린 사골과 같다. 그럼 지금의, 앞으로의 AS는 어떻게 이루어 지는가?


 이전의 AS가 부모가 등 떠밀려서 하게되는 AS라고 한다면, 앞으로는 부모가 자발적이고 적극적으로 착수와 진행을 하는 AS인데 이미 지금 우리 주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만큼 현대 도시사회의 부모들은 진화하고 있다. 아들이 ‘사업이나 할까’라는 말을 중얼거리기 전에, 딸이 한우 특등 소고기를 드시라고 사오면서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부모들이 알아서 ‘본론’으로 뛰어든다. 자식 입장에서는 여간 부담감이 줄어든 것이 아닐 수 없다. 부모의 진화와 연동하여 자녀들도 변화한 지 오래다. 남자는 더 이상 처가살이를 수치스럽거나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유복한 처가의 넓은 집에서 예정되고 계획된 기간동안 얹혀살기만 하면, 주거비와 아이들 보육비를 절감하게 되니 ‘수치심’ 따위가 들어올 공간이 없다. 두 자녀를 부모에게 맡기고 부부가 맞벌이를 한다면 최적의 경영효율을 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부모와 자식간에 협동하여 최적화된 평생 AS체계를 구축한다면 지금과 같은 불확실성의 시대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훨씬 높아질 것이다. 


올해 여름과 가을 사이, 올림픽 공원에서 딸 예진이와 함께 어색한 포즈를 취해 보았다.             사전연습 없이 즉흥적으로 한 것인데 딸과의 콜라보가 제법 좋다.


  스마트폰을 책처럼 접을 수 있고, 두루마리처럼 둘둘 말 수 있는 요즘 시대에는 먹고사는 문제인 ‘생존’ 자체를 걱정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남들만큼 할 거 하며, 무시당하지 않고, 웬만한 것 누리면서 건강하게 사는 삶’은 부모의 평생 AS 없이는 불가능한 세상이 되었다는 것을 현명하신 부모님과 못난 자식들은 이미 잘 알고 있다. 아니, 이제 온 국민이 다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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