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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명 Nov 02. 2020

오!  그대 이름은  전사!

대한민국 해병대 兵921기의 아프가니스탄 파병에 대한 추억

   저녁을 먹고 내 책상에 앉아 9시뉴스에서 나오는 여성앵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여름과 달리 매미소리가 들리지 않아 작은 소리도 또렷이 들을 수 있다. 가장 공부하기 좋은 계절이 가을이라는 옛말에 틀림이 없음을 상기하며 “현재 1년 8개월인 의무 군복무를 모병제로 바꾸는 것에 대한 토론이 열렸습니다”라는 무미건조한 음성에 나는 빠져들고 만다. 

 이어서 튜브를 통해 마취약이 흘러들어 가듯 2003년의 아프가니스탄 바그람(Bagram) 미공군기지로 나는 기억의 튜브를 타고 재빠르게 미끄러져 내려간다.    



  밤 12시쯤 되었을까. 새벽에 있을 경계근무만 빼고는 편안한 밤이 예상되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잠든 지 2시간 쯤 되었을까... 갑자기 기지 전체에 공격을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다. 등화관제로 눈앞이 깜깜한 텐트 안에서 군화를 신고, 방탄복을 입고, 철모를 쓰고 정신이 없다. 이 모든 것이 단 1분안에 준비되었다.

 “전원 배치붙어!” 침착하게 들리지만 역시 긴장감을 숨길 수 없는 해병대 파병 중대장님의 무전을 받고 우리 소대는 각자 담당한 방어 위치에 이르러 탈레반 병력이 담을 넘기만을 기다렸다. 탈레반 무장세력이 우리 기지로 곧 들어올 것이라는 첩보를 받았기에 미리 대비하고 있다가 그들이 넘어오면 방아쇠를 당겨야 했다.   

  이곳에 온 뒤로 시력이 나빠 렌즈를 끼고 생활했던 나에게는 렌즈를 낄 여유도, 심지어 안경조차 챙길 짬이 없었다. 2003년 2월 아프가니스탄에 와서 처음으로 겪어보는 탈레반의 공격이었다. 며칠 전에는 로켓포 공격(RPG-7)으로 기지 안에 포탄이 몇발 떨어졌다고 한다. 다행인지는 몰라도 자는 동안에 텐트 옆에 떨어져 인명피해는 없었다고 하니 기분이 야릇하였다. 지금도 궁금한 것은 로켓포 공격을 받았을 때 왜 아무도 깨우지 않았을까, 소리가 컸을 텐데 내 귀에는 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던 것일까... 굳이 묻고 싶지도 않았다. 그 당시에는.

 다시 탈레반 방어를 위해 위치를 사수하고 있던 나에게로 돌아가면, 나는 그 순간 ‘하나님, 하나님’ 하고 외치며 부들부들 기도를 하고 있었다. 이미 나는 약 200 여발의 탄과 철모와 방탄복으로 무장 및 방어를 하고 있었기에 이보다 못한 장비를 갖추고 있을 것이 분명하며, 훈련 또한 내가 특전사와 해병대에서 받은 훈련과는 비교할 수 없는 기초수준으로 받았을 것인 그들이 두려울 리 만무하였지만, 나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없었다. 바로 적군과 아군을 인식할 수 있는 ‘시력’이었다. 해병대 자체도 종류별 시력표를 외우다시피 하여 겨우 입대하였고, 이 아프가니스탄 파병에서도 운좋게 시력이 문제되지 않았는데 렌즈도, 안경도 챙길 수 없는 실전에서는 큰 문제가 되었다. 나는 탈레반이 넘어온다는 높은 담벼락을 향해 K2 소총을 조준하고 있었지만, 가깝지 않은 담벼락 부근의 물체는 사람과 동물만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더구나 야간이기 때문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지나가면 ‘곰’으로 보일 것만 같았다. 이때 나에게는 두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생각했다.


첫째는  무언가 담벼락에 나타나기만 하면 사살해 버리는 것. 

둘째는  누가 왔다갔다 하더라도 정확히 피아식별이 되기 전까지는 쏘지 않는 것.


경계임무 중 폼을 잡아보았다.  저 복면을 보니, 요즘 코로나19 마스크 대용으로 써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두가지 선택지에는 모두 경우의 수가 있었는데 전자의 경우, 우리편을 공격해버릴 수도 있는 것이었고 후자는 적이 넘어왔을 경우 틈을 준다는 것은 곧 내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어느 경우에나 정말 최악이었다. 겉모습만 보아서 나는 완전무장을 하고 사격 직전에 있는 용맹한 한국군이었지만, 내 마음속은 천당과 지옥을 몇 번씩 왔다갔다 했다. 다행히 탈레반은 결국 넘어오지 않았다. 한밤에 기습을 하려다가 우리가 빠르게 방어태세로 전환하는 것을 보아서인지 한시간을 기다려도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우리군 지휘관들과 동료들 모두 기뻐했지만, 가장 기뻤던 사람은 바로 나였다. 그 사건 이후부터는 안경을 쓰고 자든지, 품에 안고 자든지 했다.     


  이 밖에도 여러 일들이 기억의 튜브를 타고 방울지어 나의 머릿속으로 스며든다.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여러 국가들 중에서 아시아 국가는 한국과 태국 뿐으로 기억을 하는데, 우리보다 몇 개월 늦게 파병된 태국군들은 사막색 위장복이 아닌, 초록색 전투복을 군복으로 입고왔다. 비도 안오는데 학교 운동회에 체육복이 아닌, 혼자 비옷을 입고 온 셈이었다. 중동지역 파병을 위한 기본적인 군복준비도 안된 태국군은 기지 안에서도 사실상 왕따였고, 태국군은 자신들과 같은 아시아계이고, 비슷한 얼굴색의 우리들을 보자 반가워 하며 친해지려 다가왔지만 우리는 그동안 친하게 지냈던 미 해병대나 레인저들과 계속 지내고 싶을 뿐 청개구리 태국군을 피해다니기도 했다. 우리가 파병되었던 2003년 당시에는 천막으로 된 숙소에 에어컨이 설치되지 않았고, 온세상이 태양광선으로 인해 새하얗게 변해버리는 한낮에는 서로 아무 얘기도 하지 않다가 해가 서서히 지고, 기온이 내려가기 시작하는 저녁부터 대화를 시작하는 웃지 못할 풍경이 일상이었다. 각자 수백발의 탄약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소한 감정싸움이 어디까지 확대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미 내가 파병되기 직전 동의부대에서 전장 스트레스로 인한 충돌로 모 대위의 사망사고가 있었고, 그 사망현장에서 우리는 매일 생활했다. 

 사실상 큰 텐트라고 할 수 있는 천막 안에서 우리들은 반년을 살았는데 전갈과 독거미, 도마뱀들을 친구삼아 밤에는 웃음꽃을 동료들과 피운 기억이 난다. 셀 수 없겠지만 그래도 가장 불편했던 점은 24시간 큼지막하고 무거운 쇳덩어리 총을 소지해야 했던 것이다. 밥 먹을 때에는 물론 화장실에 갈 때, 샤워할 때, 잠잘 때에도 장전된 총을 옆에 끼고, 몸에 매야만 했다. 

 우리는 2001년 미국 9.11 테러로 촉발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여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생명은 자신이 지켜야 했고, 언제든지 ‘전사(戰死)’할 수 있다는 각오를 한 ‘전사(戰士)’로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진정 두려웠던 것은 ‘전투’ 그 자체가 아니라, 이러한 긴장된 삶 속에서 반년을 살아야 했던 전장 스트레스 였다. 탈레반 보다 사방 도처에 깔려있어 3시간 마다 사상자가 발생하는 ‘지뢰’가 무서워서 안전이 확보된 땅이 아니면 단 한발자국도 밟아서는 안되었다. 마치 등산을 할 때 바로 앞 사람이 밟았던 그 자리만 밟으며 올라가야 하는 그 규칙.  규칙을 어겨 옆을 밟으면 언제든지 번쩍하는 찬란한 빛과 굉음이 진통제가 되어 순간적 고통없이 발목이 사라지는 경험을 바그람 기지안의 군인들은 종종 하고 있었다. 물론 내가 밟고 나면 안전여부가 확인이 되기는 하겠지만.     

  우리들은 2003년 2월 육군 특전사로 파견되어 한달간 훈련을 받고,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된 다산·동의부대 해병1사단 소속 경비대였다. 육군 공병대 ‘다산부대’와 의무대 ‘동의부대’의 시설 및 병력 경호를 맡은 전투부대이다. 최근 해군 UDT 출신의 이 근 대위라는 유투버가 세간의 화제가 되어 나의 파병에 대한 추억이 새삼 떠오르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이후 나와 같은 곳에 파병을 왔었지만, 폭탄테러로 전사한 한국군 故 윤장호 병장을 기억한다.


 그동안 바쁘게만 살아오느라 잘 떠올리지 않았던 17년 전의 기억을 지금 싸늘한 가을밤의 한기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환하고 있다. 심장을 죄여오는 비릿한 화약냄새와 함께.    


 6개월간 숙소로 사용했던 텐트에서 찍은 사진.  화재발생시 순식간에 통닭구이로 변하는 것 외에는 큰 불편함 없이 나름 지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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