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명 Nov 04. 2020

외로움과 함께 춤을

우리는 외로워야 한다.  외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정기적으로 모이는 어느 모임에 여느때와 같이 갔다. 대여섯명이 모였는데, 자주 보아서 인지 아니면 서로들 간의 친밀함이 아직도 부족해서인지 모임의 분위기가 간단한 안부인사를 할 정도도 아닌 것 같았다. 그것까지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니 나 또한 우물쭈물, 엉거주춤 하고 있었는데 마치 약속이나 한 것처럼 나 외의 모두가 스마트폰을 꺼내고는 고개를 파묻는 것이었다. 별 수 있는가? 나 또한 스마트폰을 슬며시 주머니에서 꺼내 궁금하지도 않은 메일을 확인하고, 문자를 되씹어보고, 인터넷 뉴스를 보고... 누가보면 다툰 것인지 오해라도 할 수 있었는데 그것도 아니고 단지 그들은, 아니 우리들은 혼자 가만히 방치되는 것이 싫었던 것이었다. 혼자 심심하게 보이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혼자 외로움을 잠시라도 느끼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스마트폰이 생기기 전에는 우리의 삶 중간중간에 여백 내지 공백이 있었다. 학교에 가려고 버스정류장이나 지하철역으로 가는 동안에, 정류장에서 버스나 지하철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에,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에... 적어도 나는 그 5분에서 10분 남짓할 수 있는 시간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소위 말하는 ‘멍 때리기’도 하였고, 주위환경을 관찰하다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각기 다른 모습들을 살피면서 ‘저 아저씨 참 웃기게 생기셨네’  혹은  ‘저 아줌마 짐이 너무 무거운데 내가 들어주겠다고 하면 기겁할 수 있으니 가만있자..’   이런 생각들을 하였다. 언제부터인지도 잘 모르겠다. 어느샌가 길거리에 나가보면 모든 사람이 귀에는 이어폰을 꼽고 있거나, 스마트폰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 특히 출근시간이나 퇴근시간에 고개를 180도 범위에서만 돌려보면 그 모습이 장관이다. 단 10초라도 낭비하지 않고 스마트폰으로 검색을 하는지 영상을 보는지는 알 수 없지만, 모두가 ‘무엇인가 하고 있다’   

 무엇인가 하고있지 않는 사람은 아주 연로하신 할머니나 할아버지, 그리고 꼬마 아이들... 아주 연로하시지 않은 노인들도 어김없이 스마트폰 불빛으로 고개숙인 얼굴이 환하다. 

 사리분별을 아직 제대로 못하는 다섯살배기 내 딸도 스마트폰을 미숙하게나마 조작하는데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이야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스마트폰 중독이라는 첨단 통신기기의 부작용을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방금 말한 내 딸과 같은 꼬마들이나 초등학생 정도에게만 해당될 것이고(물론 성인들도 중독자가 많긴 하다), 오히려 우리 현대인은 이전보다 외로움에 대한 공포심에 중독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다. 공포심에 중독이 되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외로움’과 멀어지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이다. 

 무시무시한 외로움이란 감정에 대한 방어기제 라고나 할까?    

 그렇다면 ‘외로움’이란 정확히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보통 학창시절이나 회사생활 중에서 본의 아니게 왕따를 당하게 되어 홀로 남겨진 모습을 생각할 수도 있고, 애인이 없는 사람이 느끼는 쓸쓸한 감정, 가족이 없어 명절을 혼자 보내야 하는 여러 사람들...이들은 분명 ‘외로움’을 느끼고 있을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다.실질적으로 사형이 없어진 우리 사회에서 ‘고독사’는 가장 두렵고도 끔찍한 외로움의 최종 결정체일 것이다. 외롭기만 한 인생이라면 장수를 해도 기쁘지 않을텐데, 외로운 상태에서 가장 우리가 두려워하는 ‘죽음’을 맞이한다니, 그야말로 최악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고독사의 대다수는 ‘궁핍’이라는 경제적 가난이 고춧가루 양념으로 동반되어 상처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어버린다.

 하지만 내가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은 혼자 남겨졌을 때의 외로움이 아니라, 외로움과 자신 간 아무 관계가 없고싶은 마음, 절대로 남에게 자신의 외로운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지 않는 자존심은 또다른 외로움으로 우리를 휘어감싸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타인들과 어울리며 즐겁게 교제하며 살아가고 싶어한다. 혼자사는 인간보다 ‘더불어 사는 인간’이 훨씬 행복해 보이고, 또 그러하다. 그런데 가끔씩 외로움이 그리울 때가 있다. 외로움을 바퀴벌레 박멸하듯 절대 보여서도, 존재해서도 안되는 해충마냥 대하기에 외로움을 느낄 수 없음에서 비롯된 외로움은 약도 없는 것이다. 

 언제나 처리해야 할 일이 많고, 나를 불러주는 곳이 있고, 가야할 장소가 많아서 하루의 일정표를 세워야지만 효율적인 시간활용이 가능한 사람에게는 외로움을 느낄 겨를이 없다.

 ‘바쁜 꿀벌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 라는 말처럼 순간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감정은 사치요, 어린이의 투덜거림에 불과하겠지만, 슬퍼할 줄 알아야 타인의 고통을 알 수도 있고 충분한 슬픔 뒤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개운함과 희망이 한줄기 빛처럼 다가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외로울 때 외로워해야 외로움에서 궁극적으로 벗어날 수 있게된다.    

 외로운 상황에서는 제발 서둘러 벗어나려고 몸부림치지 말고, 그 외로움을 온몸으로 받아내어 보자. 이 외로움은 그리 오래가지 않으니까. 어색한 상황에서는 어색함을 애써 떨쳐내려 더 어색하게 굴지말고 자연스럽게 분위기에 맡겨보자. 어색함은 인위적으로 없애려고 하면 벌통을 건드리는 것과 같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전 국민이 10초의 여유가 없어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면서 무언가 바쁜 척, 집중하는 척을 한다면 외로움은 우리에게 커다란 공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모든 시도가 늪과 같이 우리를 완전한 외로움이라는 진흙속에 가두어버릴 것이다.


 문득 이런 상상을 해본다.  어떤 총각이 길을 가다가 한 여자를 보고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용기를 수백번 내어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다행히 여자는 총각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도 알지 못하고 물끄러미 딴 생각을 하는 듯 했다. 이제 바로 옆에 다다른 총각이 여자에게 말을 건넸다. ‘저기요... 실례합니다’  여자는 못 들은체 하는 것 같았다. 다시 총각은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좀더 큰 소리로 말을 건넸지만 여자는 이번에도 못들었다는 듯이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총각은 이제 완전히 용기를 잃어 ‘죄송합니다!!’ 라고 외치고 도망치듯 다른길로 쏜살걸음으로 사라졌다. 갑자기 들린 총각의 외침소리에 여자가 놀란 듯이 고개를 들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양쪽 귀에서 무언가를 빼내었다. 무선 이어폰 이었다. 이윽고 여자는 콩알 같아서 꽂으면 잘 보이지도 않는 무선 이어폰을 다시 귀에 꽂고는 아까와 같이 다른 생각에 빠져버린다. 

 이제 다같이 외로움과 함께 춤을 추어보자. 처음에는 춤에 서투르고 어색해도 우리가 이 춤에 취할 때 쯤이면, 외로움은 스스로 지쳐 떠나가게 되리...    

작가의 이전글 오!  그대 이름은  전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