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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명 Nov 04. 2020

기시감(旣視感)

이미 우리는 죽는 연습을 반복하며 해오고 있다.

  아이의 손을 살짝 잡고 이끌리듯이 마켓 입구로 들어선다. 나보다 마켓의 동선을 더 잘 아는 딸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도대체 얼마나 자주 왔길래 이곳을 꿰고 있을까’ 기가막혀 한다. 한치의 망설임 없이 딸아이가 직행한 곳은 대형 냉동고 앞. 구슬 아이스크림? 이름도 참 궁금하게도 지었다. 아이스크림을 구슬처럼 만들었다는 것인가, 아니면 구슬 속에 아이스크림이 들어있다는 것인가... 결국 구슬 아이스크림 하나를 손에 쥐고 행복해하는 아이와 마켓을 나서게 된다. 문득 이 경험이 낯설지가 않다. 분명 먼 옛날에 해보았던 장면이다


  때는 1980년대 초반. 나는 주인을 목줄로 끌어당기는 몸좋은 백구마냥 어머니의 손을 잡고 앞으로 전진한다.장소는 문구점. 다섯 마리의 사자가 합체해서 하나의 로보트가 되는 장난감을 어머니에게 보여준다. ‘엄마, 이거...’  아마 어머니는 ‘장난감도 참 애들 홀리도록 그럴 듯 하게 만들었네’ 하며 지갑을 만지작 거렸을 것이다. 잠시 후 나는 내일 결혼하는 예비신랑처럼 환한 얼굴로 문구점을 나선다. 이러한 일들이 어렸을 때 수도 없이 있었고, 지금 나 또한 딸아이와 함께 비슷한 경험을 반복하고 있다. 단지 바뀐 것은 나의 위치이다. 맨 처음 어린이의 위치에서 시작된 이러한 추억은 다시금 어른의 입장에서 마무리 되어버린다. 아기가 아닌 어린이라고 한 것은, 이러한 입장의 교차를 인지할 수 있는 시점이 어린이부터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그렇다. 

 그리고 그러한 추억도 동일한 내용의 중복일 리 없다. 다만 유사한 설정이라고 하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이제 어른의 위치에서 살면서 매번 소시적의 경험들을 떠올리며 감상에 빠질 수는 없지만, 이따금씩 밀고 들어오는 생각의 발현을 저지할 수도 없다.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 혹은 어머니와 함께 하면서 느꼈던 감정과 생각들을 지금 나의 딸아이도 나와 지내면서 하고 있으리라. 반대로 내가 지금 아이와 함께하며 지켜보며 느끼는 아련한 감정과 형언할 수 없는 행복도 우리 부모님은 나를 통해 경험하셨으리라.    

 문득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이미 내 인생의 마지막을 살짝 보고 온 느낌이 든다. 앞으로의 나의 삶에 대한 감성적인 반응도 이미 이전 세대가 해왔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이전 세대의 그것은 또다시 더 이전의 세대의 그것과 닮아있을 것이 뻔하다. 이것을 개인간의 감정이라는 미시적 접근에서 보다 거시적으로 확대하여 보면, 세대간 그리고 시대간에도 데자부 현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요즘 하늘을 나는 자동차, 휘어지는 휴대폰 등 믿을 수 없는 기술들이 출현하는 것을 보면서 예전 하늘을 나는 비행기, 전기로 불을 켜는 것, 더 예전의 성냥의 발명이나 철로 된 무기의 제작 등이 가능해졌을 때 당대 사람들이 느꼈을 감정은 ‘세상이 정말 너무나 빠르게 좋아지고 있구나’이었을 것이다. 지금 세상의 급속한 변화에 대한 우리의 감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삶이라는 극단에서 서로 역할극을 하고 있다. 여러명이 역할을 번갈아 하는 것이든, 1인 다역을 하든 상관은 없다. 주어진 수명을 다 사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특별히 색다른 삶을 살지 않는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서로의 역할들을 각각 다 해볼 수가 있다. 

 이전에 보았던 상대방의 역할을 이제 자신이 하면서 남을 이해하게 되고 반성도 할 수가 있다. 당연해 보이지만 이 또한 조물주의 신비로운 메카니즘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죽음에 대하여도 생각해 보았다. 우리들은 죽음 이후보다는 죽어가는 과정과 그 순간에 더 관심이 많을 것이다. 아니 관심 보다는 두려움 이라고 해야겠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것들 중에는 ‘죽음’이 일순위를 다툴 정도이다. 적어도 ‘탄생’ 보다는 ‘죽음’이 임팩트가 강하지 않은가? 고대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소설(문학), 예술, 대중매체 등 모든 매개체를 통해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과 그 순간까지 지겹도록 표현해 오고 있다. 우리가 TV에서 주인공을 포함한 누군가 죽어가는 모습을 볼 때 놀랍고도 색달랐던 적이 있었던가. 어찌보면 ‘왜이리 안죽을까’ 할 정도로 그 장면이 길어질 때면 지루하기만 하다. 그만큼 죽는 과정과 순간에 대해 우리는 친숙하다 못해 진부할 정도로 사전연습을 간접적으로 해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훗날 사전연습이 아닌 ‘실전’에 임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전세대의 모습을 통해 그리고 무수한 사전연습을 통해 얼마나 당황하지 않고 실제상황에 대처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어렸을 적부터 시작된 평생의 사전연습을 어느정도 진지하게 받아들였는가에 따라 개개인 마다 다를 것이다.  ‘연습은 실전처럼, 실전에는 연습처럼’ 이라는 말이 있던가?  

 이 말이 이 경우에 현답(賢答)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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