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편의점 앞에서 우연히 만나다.
대학에서 작문과 문학강의를 하고 있기에 평소 글을 읽고 쓰는 것이 내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내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조언을 해주신 기성문인이 생각난다.
“재명씨, 감옥 한번 갔다와야 하지 않나?”
“바람도 좀 펴보고...”
난 내 귀를 의심했다. 생면부지의 문인이 실례를 범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려니 하는 생각으로 그저 웃기만 했다.
영향력 있고 깊이있는 글을 쓰기 위해서는 세상에서 안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을 겪어봐야 한다는 말이다. 아름다움에서 추함, 상류층에서부터 하류층, 정신적 고결함에서부터 저급함에 이르기까지...
보통 문학과 글이라 하면 ‘문학소년’ 이나 ‘문학소녀’의 이미지가 연상된다. 이 이미지가 배태(胚胎)하고 있는 그 지적인 순수함! 아니, 순수한 지성!
하지만 실제 우리가 알고 있는 국내외 존경받는 유명한 작가들은 ‘순수한 지성’은 그렇다 치더라도 최소한 ‘문학소년소녀’ 다운 삶은 아니었다. 언제나 술과 담배에 찌들었고,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제대로 유지하지 못했다. 게다가 여자관계도 깔끔하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 이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알 것 같기도 하다. ‘문학’의 소비층은 순수한 ‘문학소년소녀’ 같은 부류이고, ‘문학’의 창조주체는 바로 ‘고통에 몸부림 치는 그들’ 이라는 것을.
1996년 1월, 서태지는 기자회견을 통해 "살을 내리고 뼈를 깎는 창조의 고통과 부담감"으로 가요계에서 은퇴한다고 밝혔다. 이를 보고 많은 사람들은 ‘창조를 하는 것이 그만큼 힘든 것이구나’ 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서태지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고, 이해하고 있다고 착각하였다.
그런데 창조하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것은 ‘결혼했기 때문에 너를 사랑한다’ 라는 말과 같다. 넌센스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미성숙하고 멋대가리 없는 멘트가 아닐 수 없다. 결혼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이 이상적인 결혼생활을 지속할 수 없듯이 ‘창조를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도 이미 공기총을 날갯죽지에 맞은 장끼와 다를 바가 없다. 몇 번 푸드덕 푸드덕 창조의 날개짓을 하겠지만 이내 낙조(落鳥)가 되고 만다.
모든 창조는 ‘고통’에서 탄생한다. 고통스럽기 때문에 창조하는 것이다.
창조는 고통의 반작용인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다. 우리가 통각(痛覺)을 통해 추위를 고통으로 느끼기 때문에 따뜻한 옷이나 집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러한 필요는 보온의 기능을 하는 ‘집’을 창조하게 된 것이다.
조물주의 창조도 ‘홀로 영광받고 싶다’는 필요에 의해, 이 필요에 앞서 ‘영광받고 싶은데 너무 심심하다’라는 고통에 가까운 괴로움에 의해 시작되었다. 모든 창조는 고통으로부터 탄생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내가 고통받고 있다는 반증이다. 창조의 고통. 이건 나에게 있어 하극상과 같은 충격으로 다가온다. 천동설의 프톨레마이우스가 편의점 앞에서 갈릴레오를 우연히 만났을 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