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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명 Sep 23. 2021

몽테뉴의 에세(essai)

『수상록』을 통해 훔쳐보는 그의 나체

  나는 죽음에 대해 상상하는 습관이 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죽음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리고 사람의 죽음에 대해서만큼 내가 기껍게 탐색하는 주제도 없다. 특히 어떤 사람이 어디서 죽었는지보다는 죽을 때 어떤 말을 했는지, 표정과 자세는 어땠는지를 주의 깊게 살펴본다.     

   


 단말마(斷末魔)에 집착했던 것일까? 불혹(不惑)에 가까운 몽테뉴는 끊임없이 죽음이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죽음 자체보다는 죽는 과정에 대한 두려움이 호기심으로, 호기심이 두려움으로 광속교차(光速交叉)하는 것을 인식하며 그는 죽음 이전에 육체와 정신의 노화를 더욱 거부하고자 했다.     

   


   죽음은 한순간의 일이지만 상당히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방식대로 죽기 위해 기꺼이 내 인생의 여러 날을 할애할 수 있다.        



 그렇다. 그는 자신을 비롯한 인간의 자의식을 중시하였고, 이러한 그의 태도는 프랑스 모랄리스트 문학의 토대를 만들었다. 나아가 수필이라는 문학장르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번에 소개할 『수상록』은 ‘시도’라는 뜻의 ‘엣세(Les Essais)’를 원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를 통해 몽테뉴는 “다른 사람이나 세상이 아닌 자신을 잘 이해하는 것이 곧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요, 세상을 이해하는 길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게 된다.

 1533년 프랑스 남부 페리고르 지방의 몽테뉴 성에서 태어난 몽테뉴는, 툴루즈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법관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몽테뉴의 영주가 된다. 그는 위에서 언급한 ‘엣세(essai)’라는 독특한 문학 형식을 만들어 냈는데, 여기에서 우리가 수필로서 흔히 말하는 ‘에세이(essay)’가 나오게 된 것도 쉽게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인간의 거짓없는 모습을 추구하며 인간의 가치를 중시한 몽테뉴는 『수상록』에서 ‘수시로 의심하고 나 자신을 경계한다’라는 장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곧 모른다는 것이다’라는 근원적 역설을 피력한다. 이와같이 몽테뉴는 객관·중립성과 논리성을 골자로 하는 법학자의 관점에서, 가볍지는 않지만 결코 과하지 않은 무게감으로 자신의 철학을 하나씩 꺼내어 놓고 있다.     



  드러나는 결함은 차라리 덜 심각하다. 정말 위험한 결함은 건강한 기색을 하고 숨어 있다    



 그는 화가 났을 때 심연의 저의를 억누르는 것보다 하인의 따귀를 갈기는 편이 낫다고 하며, 자신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껴보는 것을 제안한다. 보통 우리가 알고있는 방식의 ‘지혜’와는 정반대의 깨달음이다. 자신의 감정이라는 칼끝을 내부로 향하게 하여 자신을 희생시키지 말고, 차라리 외부에 표출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수상록』은 늙음과 죽음, 삶, 자기성찰, 고독, 명예, 학문 등 인간의 일생에 대한 그의 사상을 담은 서양의 고전수필이다. 당시 중세시대의 문학은 온전히 ‘신학’을 기반으로 하였기에 몽테뉴의 『수상록』은 성서를 인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바티칸의 금서 목록에 오르기도 하였다. 몽테뉴는 한평생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음에도 말이다. 어쨌든 20여 년간 집필된 것인지, 수정되어 온 것인지(모두 가능하다) 명확치 않은, 몽테뉴가 죽기 전까지 계속 변신을 거듭해온 이 수필은 세월의 흐름에 따른 몽테뉴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다. 몽테뉴는 아마 자신의 벗은 모습을 은근히 세상에 보이고 싶어했으리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내가 ‘또다른 나’가 되어 ‘원래의 나’를 부드럽게 수건으로 닦아주며, 세심하게 단장을 해주는 것이 바로 몽테뉴가 바라는 모습일 것이다. ‘또다른 나’‘원래의 나’에게 온전히 몰두하여 정신을 단련하고 둘만의 밀회를 즐기면서 인생을 즐기고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대의 영혼이 참된 선은 깨달은 만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대는 생명을 연장하거나 명성을 높이고자 하는 욕심을 부리지 않고도 만족할 수 있다.        



 『수상록』은 삶과 죽음에 대한 자기 명상의 수필이다. 셰익스피어도 이 책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햄릿의 대사를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18~19세기 독일의 철학자이며 염세사상의 대표주자격인 쇼펜하우어(1788~1860)도 『사랑은 없다』라는 그의 인생론 에세이에서 ‘죽음’에 대해 지나친 탐닉을 하고 있다. 쇼펜하우어의 바로 다음 세대인 포르투갈의 페르난도 페소아(1888~1935) 또한 『불안의 서(書)』라는 철학 에세이를 통해 ‘존재의 뫼비우스 띠’를 발견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에세이의 시초라 할 수 있는 『수상록』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수상록』은 서양 고전수필의 시초가 되는 에세이 그 자체이다.   

  

 요즘 서점의 에세이 베스트셀러 코너에 가 보면, 자기소개도 하는둥 마는둥 써놓고, 글쓴이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는 문구와 우스꽝스럽다 못해 장난질 비슷한 그림과 ‘여백의 횡포’로 점철된 젊은이들의 에세이들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게 무슨 책이라고 펴냈남’ 하며 혀를 끌끌 차면서 ‘도대체 이런 장난글을 누가 찾기에 베스트셀러란 말인가’ 라는, 진화에 실패한 기성세대의 외침을 따라할 무렵 이들의 글이 몽테뉴의 그것과 매우 닮아있다는 사실에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타인을 위한 삶은 충분히 살았다. 이제 남아있는 인생만큼은 자신을 위해 살자. 모든 생각과 의도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안위를 지향하게 하자. 확실한 자기만의 방을 마련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라 다른 일과 병행하기에는 다소 벅찰 수 있다. 하지만 신이 우리에게 떠날 겨를을 주었으니 채비를 하자.       


 

 요즘 젊은이들의 외침인 ‘나대로, 내맘대로 살자’, ‘모든 것은 나를(내 기분을) 위해서’가 임진왜란(1592~1958)  훨씬 이전의 『수상록』에서 군데군데 발견되는 것을 꼭 이상하게만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런한 점에서라면 이미 현대의 수필가들은 서양의 몽테뉴라는 대선배의 가르침을 충실히 좇고 있다. 굳이 아쉬운 점이라면 이들이 동양의 그것보다는 서양의 인본주의를 선택했다는 것일까?


 1592년 9월13일. 일본이 조선국토를 마음껏 유린하고 있던 임진년 이맘 때에 몽테뉴는 59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생을 마쳤다. 불현듯 그토록 죽음에 대해서, 그 과정과 순간에 대해서 연구하고 준비했던 그의 마지막 모습 치고는 시시하다는 생각을 하며,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동양의 성어를 떠올린다. 서양의 수필가나 철학자들이 수세기에 걸쳐 ‘죽음’에 대한 수준높아 보이는 깊은 사유를 하여 왔지만, 그들이 ‘죽음’의 검은 옷깃이라도 보거나 만지지 못한 것은 평범한 우리네들과 다를 바가 없다. 자고로 군자는 말수가 적어야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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