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명 Oct 22. 2021

까뮈의 사르트르

『반항하는 인간』을 둘러싼 논쟁

 형님이라 부르며 친하게 지내던 형이 있었다. 그 형님은 “넌 이제 우리쪽 사람이야”라고 하며, 마치 학계나 폭력집단의 계파를 연상시키는 듯한 발언을 했다. 18세기 북학파들은 청에 사신으로 다녀온 경험을 연행록으로 기록하여 청의 선진 문물제도를 수용하자는 북학론을 구체화하였는데, 박제가는 그의 저서 『북학의』를 통해 “조선은 청 라인이야”라며 노골적인 중화 관념을 표방한 반면, 함께 청에 다녀왔던 이덕무는 “청은 청이고, 조선은 조선일 뿐이다”라는 객관적인 입장을 『입연기』를 통해 밝히었다. 


 까뮈는 길들여지는 것을 거부했다. 사르트르는 까뮈를 처음 본 순간, 넌 나만 따라오면 된다며 프랑스 일류 사교계로 그를 인도하였지만 결국 이들의 유명하고도 엇갈린 관계는 때 이른 까뮈의 죽음으로써 겨우 우정으로 미화되고 수습될 수 있었다. 까뮈는 북학파의 이덕무와 같았는데, 까뮈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했던 사르트르는 애초에 까뮈의 본질을 간파하지 못하였던 것인지, 아니면 그를 변화시키는 것에 실패한 것인지 결국 죽음으로까지 반항하는 까뮈를 진정시킬 수 없었다.  


           

우리가 겪는 일상적 시련 속에서 반항은 사유의 차원에서의 

'코기토(cogito)'와 같은 역할을 한다. 

즉 반항은 원초적 자명함 그 자체인 것이다.

그러나 이 자명함은 개인을 그의 고독으로부터 끌어낸다.

반항은 모든 인간들 위에 최초의 가치를 정립시키는 공통적 토대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존재한다.     


- ‘반항하는 인간’중에서 -                



 까뮈는 데카르트의 cogito 명제를 차용하여 반항의 개념을 사유의 차원 이상으로까지 확대한다. 어떻게 보면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보다 우리에게 직접적이고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점에서 까뮈의 실용주의는 위에 언급한 북학파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사물의 근본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천착하는 일이 아니라, 그보다는 눈앞의 

세계가 곧 현실이기에, 먼저 이 세계 속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아는 일이다.   


       

 까뮈의 소위 ‘반항론’은 추상적인 개념이라는 외피와는 달리 구체적인 삶, 즉 윤리의 문제로 접근하며 우리의 생활속으로 파고들고자 한다. 『반항하는 인간』은 『시지프의 신화』와 더불어 까뮈의 대표적인 에세이이며, 이 책으로 인해 까뮈와 사르트르는 공식적으로 명백한 ‘적(敵)’이 되고 만다. 까뮈와 사르트르의 논쟁사는 세계 각국에서 연구되고 논문으로까지 발표될 만큼 세간의 관심을 받았는데, 사실 이들의 관계는 처음부터 적(敵)이라고 보는 것이 본질에 가까운 해석일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둘은 본래 적(敵)으로 태어났다. 

 

 부르주아 출신으로 이미 유명인사이자 대작가로 이름을 떨치고 있던 여덟살 위의 사르트르와 알제리의 가난한 이주민 출신으로 준수하고 매력적인 외모 외에는 별다른 특징이 없던 까뮈는 자신과 상반되는 색다른 요소를 서로에게서 발견했기에 둘은 첫 만남부터 강한 자력을 느낀다. 물론 연장자이자 이 분야 선배인 사르트르가 까뮈를 이곳 저곳에 소개하며 이끌고 다녔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사르트르(J. P. Sartre)는 실존주의를 대표하는 철학자로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가 그의 사상을 집약하고 있다. 실존주의는 현대의 과학기술 문명과 전쟁 속에서 비인간화되어 가는 현실을 고발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철학사조인데, 사르트르는 무신론자로서 개개인의 실존을 문제시 하고, 이에 따른 주체적 존재성을 강조한다. 사르트르는 이 세계의 모든 존재를 ‘의식의 유무’를 기준으로 하여 의식이 없는 ‘즉자존재(Being in itself)’와 의식이 있는 ‘대자존재(Being for itself)’로 구분하였고, 대자존재는 인간존재에 해당하기 때문에 자기의식을 가지고 자신을 대상화하여 스스로를 바라볼 수도 있고, 선택에 따른 책임감으로 번뇌를 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나와 타자는 공존할 수 없고 갈등과 투쟁의 관계이기에 타자는 지옥이다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한 것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알베르 까뮈의 대표사진. 사르트르도 못지않은 애연가였지만, 그 느낌이 다르다.



                    장 폴 사르트르의 대표사진.  까뮈도 못지않은 애연가였지만, 그 느낌이 다르다.



 한편 까뮈는 『반항하는 인간』에서 개인적 차원의 부조리와 집단의 반항, 형이상학적 반항, 역사적 반항을 살펴봄으로써 반항이란 무엇이며 그 속에 내재된 원초적 정신으로부터 초래된 결과가 무엇인지를 반성한다.비록 진지한 사상적 담론보다는 주변 여성들에 대한 음담패설로 시시덕거리며 친분을 나누어 온 까뮈와 사르트르의 관계 초반에는(사실 그들이 처음 만나기 이전부터) 서로의 작품에 대해 호평 품앗이를 하였지만, 1942년부터 구상하여 오다가 1951년에 출간한 『반항하는 인간』은 당시 정치와 국제정세에 대한 사상적 대립으로 이미 거미줄처럼 금이 가버린 그들의 관계를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산산조각 내고 만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진지한 내용의 어려운 에세이는 인기가 없었음에도 『반항하는 인간』은 나름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사르트르가 편집주간으로 있던 <현대>로서는 달갑지 않은 현상이었는데, 당시 의협심에 불타고 있던 29세의 프랑시스 장송(Francis Jeanson)은 사르트르의 측근으로서 『반항하는 인간』에 대해 가혹할 정도로 폄하하는 서평을 발표한다. “발육부진의 대작”이라고 조롱하며 문학적으로는 성공한 작품이라는 비소(誹笑)를 보내는 장송을 건너뛰고 까뮈는 사르트르에게 직접 돌진하고 만다. 장송이 까뮈의 연약한 마음을 난도질하는 칼을 휘둘렀지만, 그 내막에는 사르트르가 있음을 직감한 것이다. 


 여기까지 보면, 도대체 우리가 프랑스의 한때 잘나갔던 두 작가, 까뮈와 사르트르의 우정과 결별에 대해 시시콜콜히 알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지 반문할 수도 있겠다. 1960년 1월 4일, 까뮈는 아내와 전철을 타려 했지만 친구의 설득으로 그의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해(플라타너스 나무를 박았다) 현장에서 목이 부러져 47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이 사고가 발생하기 약 3년 전에 까뮈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아이러니한 점은, 까뮈가 사망하기 며칠 전 인터뷰를 했는데, “자동차 사고로 죽는 것보다 더 의미없는 죽음은 상상할 수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는 것이다. 까뮈는 이 밖에도 자신이 사르트르와 함께 실존주의자로 여겨지는 것에 대해 완강히 거부를 해왔지만, 사실 까뮈는 실존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마치 아빠에게 잔뜩 화가 난 어린 자녀가 울음을 터뜨리며, “난 아빠 아들이 아니야!”라고 소리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결국 끝내 화해하지 못하고 영별(永別)을 한 까뮈와 사르트르는 실존주의의 아들이며, 아버지이다. 

 아버지가 없는 아들이 없듯이, 사르트르 없이는 까뮈는 존재할 수도 없고, 그 역도 성립할 수 없다.

 반항하는 아들이었던 까뮈. 그는 반항하였기에 더욱 사랑스럽고, 아름답다.          


즐거운 한때의 까뮈와 사르트르. 까뮈의 대각선 위로 사르트르의 여자친구(부인?)인 보부아르(검정색 옷)가 보인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계약결혼을 하였다. 실제 결혼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몽테뉴의 에세(essai)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