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가려서 할 것』을 통해 살펴본 유중림의 경고
제20대 대통령선거가 세 달 앞으로 다가왔다. 누구를 지지하든, 지지하는 사람은 없고 차악(次惡)을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든 그 ‘누군가’가 나라를 위해 이왕이면 지혜로운 사람이길 바라는 마음은 매한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지혜로움의 척도는 과연 무엇일까? 지혜의 유무는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여러 기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말’을 통해 이를 분별할 수 있음은 우리 스스로도 이견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바이다.
이번에는 조선 후기의 의관(醫官)이었던 ‘유중림(柳重臨)’이 쓴 『말을 가려서 할 것』이라는 고전수필을 통해 말하기와 듣기의 바람직한 자세에 대해 고찰해 보려고 한다.
옛말에 이르기를,
“질병은 입으로 들어오고 재앙은 혀로 나간다.”
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입이란 재앙을 부르는 문이요, 혀는 목을 자르는 칼이다.”
라고 하였는데 이 모두가 지극한 교훈이다. 재앙을 부르는 길이 꼭 한길만은 아니겠지만 그 중에서도 말이 항상 문제가 된다. 이 때문에 주(周)나라의 태묘(太廟) 앞 금인(金人)도 입을 세 군데나 꿰매었다. 이 역시 성인(聖人)이 만세에 교훈을 남기신 뜻이니, 말을 삼가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1993년 제18회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배우 이덕화. 이덕화는 '살어리랏다'라는 위 영화에서 망나니의 모습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설화(舌禍)를 당한 이가 생애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얼굴이다.
이러『말을 가려서 할 것』『말을 가려서 할 것』
유중림의 생애에 관하여 많은 기록이 있지는 않으나, 1705년(숙종 31) ~ 1771년(영조 47)의 인물로서 태의원내의(太醫院內醫)가 되어 서반(西班)의 녹, 즉 군직의 녹을 받으면서 의무에 종사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의관 뿐만 아니라 농학자로서 <증보산림경제>를 편찬하기도 하였는데, 고구마, 벼, 옥수수 등의 재배법이 이 책에 기록되어 있다.
무엇보다 위 ‘옛말에 이르기를’에서 유중림은 인생의 교훈을 위해 옛말을 찾아 나서지만, 우리는 이 유중림을 고전으로 발굴하고 있다는 것에서 시대간의 상대성과 진리의 영원성을 동시에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위 주나라의 태묘 앞 금인 관련 고사에서는 공자가 주나라의 전설적 시조 후직(后稷)의 태묘(太廟)에 갔을 때 사당의 오른쪽 섬돌 앞에 금으로 만든 사람의 상이 서 있었는데, 그 입이 세 바늘이나 꿰매져 있었고 등뒤에 “옛 사람의 경계의 말이라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 말을 많이 하지 말라. 말이 많으면 일을 그르친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또한 병종구입(病從口入) 화종구출(禍從口出), 즉 병(病)은 음식을 조심하지 않는 데서 오며, 화(禍)는 말을 조심하지 아니하는 데서 나온다는 뜻으로 지나친 구복(口腹)의 욕심과 말을 삼가야 함을 이르는 말이다. 역시 의관이기에 질병의 대표적인 출처가 입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유중림을 무엇이 이토록 말에 대하여 금기시 하도록 만들었을까?
아마도 숙종 때의 두의(痘醫)로 봉직했던 아버지 유상(柳瑺)의 가르침이 아니었을까?
설화(舌禍)로 인한 여러 인물들의 흥망성쇠를 유중림의 아버지는 평생 보아왔을 것이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과 같은 인걸(人傑)이라 할지라도 조정(朝廷)에서 잘못 놀린 혀 하나 때문에 목이 날아가고 귀양 보내지는 모습을 아버지를 거쳐 아들 유중림은 마음속 깊이 반면교사로 삼았을 것이다.
말이 많으면 지루하고 번거로워서 듣는 이가 좋아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말 가운데 망발(妄發)이 있을 수 있으므로 말은 적게 하는 것이 제일이고 적게 하면서도 순서를 잃지 않아야 좋다. 만약 생각하지 않고 불쑥 가볍게 말했다가는 피해를 보는 일이 많게 된다.
구화지문(口禍之門) 설참신도(舌斬身刀), 즉 항상 말조심을 해야 한다는 것과 공자가어(孔子家語) 관주편에 수록된 ‘입을 세 번 꿰맸다’라는 뜻의 삼함기구(三緘其口)는 말을 재앙을 부르는 원천으로 보아 최대한 말은 적게 해야 하고, 최소한의 말을 함에 있어서도 그 순서를 생각해야 한다고 한다.
시비를 따지는 일은 사람에게 없을 수 없는 일이지만 조정(朝廷)의 이해(利害)와 관리들의 잘잘못 그리고 고을 사람들의 허물이나 약함은 절대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사람마다의 생활 태도라든지 잡다한 사생활 같은 것도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한다. <중략>
여럿이 모인 곳에서도 그와 같은 말이 시작되면 곧 몸을 일으켜 그 자리를 피하고 절대로 끝까지 들어서는 안 된다.
약 3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구구절절 모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가르침이다. 공직에서의 업무 외에는 대부분 남을 참소하거나 헐뜯는 일로 시간을 보냈을 법한 조선 후기의 조정에서 위와 같은 삶의 태도를 견지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마치 우리나라 정치판에서 스님이나 목회자가 교리에 따라 활동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유중림은 평생 ‘말을 가려서 하라’는 가훈을 받들어 약을 다루는 전문성을 바탕으로 자신의 소임을 별 탈 없이 다하였다.
남부러울 것 없는 권력을 휘둘렀던 김부식의 초상화. 개인적으로 서울시 서대문구에 사시는 전모씨와 오버랩이 되는데, 필자 또한 설화(舌禍)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으니 이만 하련다.
한편 유중림과 거의 정반대의 삶을 산 인물이 있는데 그는 바로 김부식(金富軾, 1075~1151)이다. 후대의 평가가 일관되지 않고 복잡한 김부식은 정치가, 문인, 유학자, 역사학자 등 여러 분야에서 공적을 쌓았고,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삼국사기>가 바로 그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20대 초에 과거에 급제하고 재상직까지 맡았던 생래적 정치가일 정도로 처세술에 능했던 김부식은 인종의 신임을 바탕으로 종횡무진 고려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처세 뿐만 아니라 유교적 학문의 깊이도 상당하였고, 고금의 학식에 있어 그를 당해낼 사람이 없었기에 이는 마치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 같은 모습이었다. 김부식은 결국 ‘묘청의 난’을 평정하여 큰 공을 세웠는데 이별의 애틋한 감정을 아름답게 잘 표현한 <대동강>이라는 한시를 지은 정지상(鄭知常, ?~1135)을 이 때 처형하고 만다. 사실상 동료이자 문학에 있어서는 자신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은 라이벌이었던 정지상을 제거했던 김부식은 죽은 정지상이 (꿈에) 자꾸 나타나 괴롭힘을 당하였고, 말년에는 무신들에게 시달림을 받다가 7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아이러니한 점은 유학자로서의 최고 경지에 다다른 김부식이 공자의 가르침과는 반대에 해당할 수 있는 ‘질풍노도의 인생’을 살았다는 것이고, 유학과는 큰 관련이 없이 전문 기술인으로서 사농공상(士農工商) 가운데 중간 위치였던 ‘중인’에 해당하는 유중림은 유교사상을 철저히 생활화 하였다는 것이다.
말을 가려서 하는 것 외에도 유중림은 ‘말을 할 때 온화한 목소리로 나직하고 부드럽게’하면 듣는 이도 저절로 희열을 느끼게 된다고 하며, 말하기 뿐만 아니라 듣는 것에 있어서도 ‘남의 말을 들을 때는 마음속으로 거짓과 참을 가려들어야지 모두 다 믿어서는 안된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밖에도 세세한 잠언(箴言)들이 있는데, 소개하자면 아래와 같다.
남을 칭찬할 때는 너무 지나치게 하지 말고, 남을 책망할 때도 너무 혹독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야비하고 사리에 어긋나는 말, 박절하고 듣기 흉한 말은 절대 입 밖에 내지 말아야 한다.
집안 어른은 말을 할 때, 충후(忠厚)하면서도 간략하고 엄중해야 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유중림의 당부는 이미 우리들이 대부분 들어오고, 잘 아는 내용들이다. 하지만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위력을 가장 잘 알고있던 유학자 문신들이 조선을 중상모략(中傷謀略)으로 망친 역사적 사실을 볼 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모두 조정에서의 ‘말싸움’ 가운데 나타난 역사적 산물임을 볼 때 위대한 진리와 교훈은 ‘글’이 아니라 ‘체험’을 통해 사람에게 각인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기독교의 성경에서도 글로만이 아닌, 마치 체화(體化)를 통해 나온 듯한 솔로몬의 ‘말’에 관한 신신당부를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 먼 중국 고대의 감흥없는 공자의 가르침 보다는, 혀를 잘못 놀려 목이 날아가거나 사약(賜藥) 한 사발을 원샷하는 옆의 동료를 볼 때 비로소 진리는 방점(傍點)을 찍을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