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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명 Aug 21. 2021

내간체(內簡體)의 꿈

동명일기(東溟日記)를 통해 살펴본 의유당의 실리

  내간체(內簡體)는 부녀자들이 사용했던 한국의 고전 문체이다. 문장의 주체가 부녀자여야 하고, 우리말과 글로 쓰여져야 하며, 감정의 꾸밈없이 정다운 세련미를 보이는 것이 내간체의 요건이자 특징일진대 이곳에 소개할 의유당 부인의(이하 의유당) 동명일기(東溟日記)는 가히 본 문체의 정수(精髓)로 꼽히는 기행수필이자 고전수필이라 할 수 있다. 동명일기가 포함되어 있는 “의유당관북유람일기(意幽堂關北遊覽日記)” 이외의 내간체 작품으로는 계축일기(癸丑日記), 한중록(閑中錄), 인형왕후전(仁顯王后傳), 조침문(弔針文), 규중칠우쟁론기(閨中七友爭論記), 산성일기(山城日記) 정도를 들 수 있다. 내간체는 부녀자들이 거처하는 규방(閨房)에서나 통용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때가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내간(內簡)’이라는 단어는 ‘조선시대 부녀자들이 한글로 주고받던 편지’라는 의미로서 남성중심의 당시 유교사회에서는 고려가요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고 조선 유학자(한학자)들에게 조롱을 당한 것처럼 권위와는 거리가 멀었고, 결과적으로 그 뛰어난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기축년(1769년) 팔월에 서울을 떠나 구월 초승에 함흥(咸興)으로 오니 다 이르기를 ‘일월출(日月出)이 봄직하다.’하되 상거(相距)가 오십 리라 하니 마음에 중란(中亂)하되 기생들이 못내 칭찬하여 거룩함을 일컬으니 내 마음이 들썩여 원님께 청하니, 사군(使君)이 하시기를 “여자의 출입을 어찌 경(輕)히 하리오.” 하여 뇌거불허(牢拒不許)하니 하릴없이 그쳤더니 신묘년(1771년)에 마음이 다시 들썩여 하 간절히 청하니 허락하고 겸(兼)하여 사군이 동행하여 팔월 이십일 일 동명(東溟)에서 나는 중로손(中路孫) 한명우의 집에 가자고 거기서 달 보는 귀경대(龜景臺)가 십오 리라 하기에 그리 가려 했는데, 그때 추위가 오래도록 계속되어 길 떠나는 날까지 구름이 사면으로 운집하고 땅이 질어 말 발이 빠지되, 이미 내킨 마음이라 동명으로 가니 그날이 종시 청명(淸明)치 아니하니 새벽달도 못 보고 그저 환아(還衙)를 하려 하더니, 새벽에 종이 들어와 ‘이미 날이 좋아졌으니 귀경대로 오르자.’간청하기에 죽을 먹고 길에 오르니 이미 먼동이 트더라.



 조선 영조 때 함흥 판관으로 부임한 남편 신대손을 따라가 그곳에 머물던 의유당은 기축년(己丑年)에 해돋이와 달맞이 경치가 빼어나다고 소문난 함흥 귀경대를 구경하기 위해 1차 시도를 해보지만, 남편은 일언반구(一言半句)로 거절해 버린다. 그로부터 2년 뒤인 신묘년(辛卯年)에 다시 남편을 설득하여 동명, 즉 동해(東海)로 남편을 동행하여 떠날 수 있었는데 날씨가 좋지 않아 그물로 고기잡는 ‘후리질’만 구경하고 돌아오게 된다. 아쉬움이 남은 의유당은 다시 1년 후인 임진년(壬辰年)에 3차 시도를 하였다가 남편이 엄히 막아 끊자 다음과 같은 격조높은 ‘떼’를 쓰게 된다.



“인생이 얼마나 되오? 사람이 한번 돌아감에 다시 오는 일이 없고, 심우와 지통(至痛)을 쌓아 매양울울(鬱鬱)하니 한번 놀아 심울(心鬱)을 푸는 것이 만금(萬金)에 비하여 바꾸지 못하리니 덕분에 가고 싶도다” 



 이쯤되자 남편 신대손도 의유당을 막을 수 없어 1772년 9월 17일 귀경대로 일출(日出)과 월출(月出)을 보러 다함께 떠나게 된다.



 속기생(屬妓生) 차섬이·보배 쾌락 대희하여 무한 치장 기구를 성비하는데 차섬이·보배 한 쌍, 이랑이·일섬이 한 쌍, 계월이하고 가는데 십칠 일 식후에 떠나려 하니 십육 일 밤을 당하여 기생과 비복이 다 잠을 아니 자고 뜰에 나려 사면을 관망하여 혹 하늘이 흐릴까 애를 쓰니 나 역시 민망하여 한가지로 하늘을 우러러보니 망일(望日)에 월식(月蝕) 끝이라      


    일월출을 보기위해 의유당 부인을 따라나선 기생 차섬이, 보배, 이랑이, 일섬이, 계월이는 위  평양 모란봉

    기생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비가 오지 않길 기도하며 소풍 전날 잠못 이루는 아이들같이, 귀경대로 가기 하루 전날 밤 의유당과 그 집안 기생들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밤을 지새운다. 그리고는 이렇게 또다시 일월출을 보기 위한 여행을 하는 것이 모두 사군(使君)의 은혜라 하여 남편에게 감사와 공(功)을 돌리는 것은 아마도 이 시대 여류작가들의 생존전략이었으리라!



 물 치는 소리 장하매, 청풍이 슬슬이 일어나며, 다행히 사면 연운(煙雲)이 잠깐 걷고, 물밑이 일시에 통랑하며, 거기에 드리운 도홍빛 같은 것이 얼레빗 잔등 같은 것이 약간 비치더니 차차 내미는데, 둥근 빛 붉은 폐백반(幣帛盤)만한 것이 길에 흥쳐 올라붙으며, 차차 붉은 기운이 없고 온 바다가 일시에 희어지니, 바다 푸른빛이 희고 희어 은 같고 맑고 좋아 옥 같으니, 창파 만 리에 달 비치는 장관을 어찌 능히 볼지리요마는, 사군이 세록지신(世祿之臣)으로 천은(天恩)이 망극하여 연하여 외방에 작재(作宰)하여 나랏것을 마음껏 먹고, 나는 또한 사군의 덕으로 이런 장관을 하니 도무지 어느 것이 성주(聖主)의 은혜 아닌 것이 있으리오.



 위는 의유당이 월출 장면을 묘사하면서 그 감상을 남편과 임금에 대한 고마움으로 마무리하는 부분이다. 당시 사대부 여성들은 비교적 제약없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남편을 공경하고, 또 존경하는 남편이 각골난망(刻骨難忘)하며 몸둘 바 몰라하는 임금을 인정하는 표현을 장황한 만연체로 구사해야만 했을 것이다. 잠시 여행을 다녀올 수 있는 자유조차 인정되지 않았던 그들에게 조선의 유교사회가 요구하는 명분이란, 남성의 가부장적 권위에 순응하는 것이었다.
 동명일기에서 나타난 내간체에 대해 ‘여성의 섬세한 필치가 돋보인다’, ‘격조 높은 안목과 탁월한 표현력을 구비하고 있다’ 등 의유당의 문학적 역량에 대한 찬사가 일반적이지만, 서양의 여류작가들에게 ‘내간체’라는 용어는 그 유사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남성에게 순종하는 여성들이 안방에서 짧게 쓰는 편지글 문체’여성작가에 대한 억압이며, 문학적·사상적 그루밍(Grooming)에 지나지 않는다.
 무엇보다 동명일기에서 남편 신대손은 의유당 김씨(혹은 남씨)의 모든 여정에 동행함으로써 ‘남성의 감독 아래에서만 허용되는 여성의 자유’라는 향의 입자를 이곳저곳에 떨어뜨리고 있다.


 동명일기는 조선 후기 여류 수필을 대표하는 작품이지만, 그 심연(深淵)은 남성에 종속되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당시 여성들의 삶이 그러했음에도 의유당은 겉으로는 시대적 요구에 순응하며, 안으로는 양반부인 계층의 품위를 보여주는 실리를 챙길 수 있었다.
 내간체(內簡體)는 얼핏 여성 작가들을 구속하는 포승줄로 보이지만 사실 여성들이 실리를 챙기기 위해 그들 스스로 고안한 ‘풀려있는 포승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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