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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명 May 26. 2022

괴테로 태어나다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시와 진실』을 통한 그의 삶과 소회

괴테는 대하다. 다른 이들이 두세 번은 살아야 접해볼 수 있는 그의 직업상 광역(廣域)과 촌음(寸陰) 속 여유는 비슷한 부류(?)였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인생 전반에서도 풍기는 향취이다. 83세까지 살았던 괴테 말년의 비서이자 제자인 요한 페터 에커만(Johann Peter Eckermann, 1792~1854)의 눈에 그의 스승은 범접할 수 없는 거인이었는데, 에커만이 저술한 《괴테와의 대화》는 (특히 만년의) 괴테연구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이번에는 그의 자서전 『시와 진실』이라는 작품을 관조(觀照)로 시작하여 천착(穿鑿)을 거쳐 통념(通念)을 정색하는 것으로 맺으려 했으나 중간역을 거치기에는 레일이 짧다는 생각이다.   어쨌든 다른 자전(自傳)들과는 다르게 이 작품은 그의 광대한 인생 전체가 아닌, 탄생에서부터(1749) 바이마르 공화국으로의 초빙(1775)까지의 기간만을 다루고 있으니 ‘성장기 자전적 에세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유년과 청년기의 일화와 사색을 숨김없이 흩뜨리고 있는 이 작품의 영향을 받아 괴테의 팬 헤르만 헤세(Hermann Karl Hesse, 1877~1962)는 《데미안》을 탄생시켰으리라!         



스위스 지부  괴테 팬클럽 회장  '헤르만 헤세'

 


드디어 불행은 우리집에도 닥쳐왔으며, 내 증세는 특히 심해서 온몸에 발진이 일어났고 얼굴 일부도 두창으로 덮였다. 나는 며칠동안 눈도 뜨지 못한 채 극심한 고통 속에서 누워 있었다. 가족들은 될 수 있는대로 나의 고통을 덜어주려고 애썼고, 내가 비비거나 긁어서 병세를 악화시키지만 않는다면 무엇이든지 사 주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고통을 꾹 참았다. 그러나 가족들은 널리 알려져 있던 민간요법에 따라 나를 될 수 있는대로 따뜻하게 해주려 했는데, 그 때문에 병세는 더욱 악화되기만 했다.  


        

 괴테는 9살이 되었을 때 천연두에 걸리고 만다. 당시 종두법이 장려되고 있어서 독일의 상류층은 의료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고, 귀족계층은 아니지만 실질적인 귀족생활을 하였던 괴테의 집안은 종두법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코로나 백신과 같은 정도의 미약한 신뢰감만을 주었을 당시 신약에 대한 불신으로 괴테의 부모는 민간요법을 택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애꿎은 괴테만 고생을 했던 경험이 위에 나와있다. 괴테는 원래 법학자이자 법조인이었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의 첫 직업은 변호사였다. 법(法)은 부분적으로, 그리고 필연적으로 호전적일 수밖에 없다. 도덕, 윤리와 달리 구속력과 강제력이 있어 위반 시 그에 따른 제재가 수반된다. 이렇듯 괴테는 웬만하면 천연두로 고생했던 일화를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도 있었겠지만, 굳이 확대피해에 대한 책임소재를 자신의 부모에게 전가함으로써 객관성·중립성이라는 법학적 요소를 자신의 자전에서 확보하고 있는 것에 필자는 “역시 괴테!”라며 탄복할 수밖에 없다.    


       

신앙에 있어서는 믿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무엇을 믿는가 하는 것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지식은 정반대이다.

안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아느냐, 얼마나 잘 아는냐, 그리고 얼마나 많이 아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괴테는 기독교의 유일신인 하나님에 대해 언제나 질문했다. 그가 25세때 발표하여 유럽 전체를 심각하게 흔들어놓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과, 비슷한 무렵 집필을 시작하여 죽기 8개월 전까지 60여년간을 매달렸던 《파우스트》라는 대작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원망 그리고 신뢰와 믿음이 주인공의 번뇌와 절규의 외침 등 다양한 모습으로 잘 나타나 있다. 지성영성의 사이에서 양자 모두와 친밀했던 괴테는 또한 ‘여성’에 대한 칭송으로 그의 인생과 작품을 멋지게 장식할 수 있었다. 그는 (특히 자신이 사랑했던) 여성을 언제나 그의 작품에 실제와 유사한 모습으로 등장시켰으며, 덕분에 괴테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은 놀랍도록 현실감이 있어 독자의 의식을 지배할 정도였다.    


롯데의 창업주 故 신격호 회장(1922-2020)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로테'의 이름을 따서 '롯데'를 만들었다.




나는 자연에서 어떤 풍경을 바라보게 되면 그것을 그림으로 고정시켜 그 순간을 확실한 기념으로 남기고자 시도했다.

그림에 대한 열정과 또 시간에 쫒기는 상황은 어쩔 수 없이 나로 하여금 기발한 보조 수단을 사용하도록 했다.

흥미 있는 대상을 포착하여 몇 개의 선으로 그 윤곽을 대충 종이에 스케치한 다음, 화필로는 그려낼 수 없거나 표현할 수 없는 구체적인 점은 바로 그 옆에다 글로 상술하는 것이다.

나중에 시나 소설에서 필요하기만 하면, 그 어떤 장소든 즉시 내 눈앞에 떠올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었다.          


 괴테는 색채학자였다. 사실 괴테는 음악가이기도 했고, 화가, 식물학자, 철학가이기도 했다. 이 밖에도 괴테의 직업이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로 마치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직업의 개수로 경쟁을 하는 듯 보인다. 물론 이 모든 활동들이 경제적 수입과 연결되지는 않아, 엄밀히 말해 아마추어와 프로의 사이에 위치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괴테는 예능이나 자연과학에서도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는 점이다.           

괴테의 색채분포 이미지. 필자의 눈에는 칼라풀한 도너츠로만 보인다...


내가 한동한 몰두한 것은 소위 자갈즙이었다.

순수한 차돌을 적절한 분량의 알칼리에 녹이면 생겨나는 것으로, 거기서 투명한 유리가 나오는데, 공기에 닿으면 녹아 아름답고 맑은 액체가 된다....

자갈 성분이 철학적으로 믿었던 것처럼 염기와 친밀하게 결합되는 일이 결코 없다는 것을 알고는 결국 내가 지치고 말았다.        

  


 소시적부터 암기력이나 상상력이 뛰어났기에 태생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축구스타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손웅정)와 같이 괴테의 아버지는 밀착교육으로 아들을 양육했다. 괴테 본인에게는 숨막힐 듯한 억압과 구속의 유년기였겠지만 훗날 그의 걸작들을 탄생시킨 자양분을 배양했던 시간이라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괴테의 청년기까지의 인생을 풀어낸 이 『시와 진실』은 그가 60세가 되던 해에 집필을 시작하여 81세에 마치게 된다. 청년기 이후의 더 오랜 세월에 대한 글이 없다는 것이 의아할 수 있는데, 아마 청년기까지의 일화와 사색, 그리고 성찰만으로 이미 자신의 인생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는 괴테의 독일식 실용적 발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우리가 볼 때 경이로울 정도로 탁월하며 모든 것을 다 갖추었던 요한 볼프강 폰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는 과연 타고난 인물이었을까? 아니면 많은 사람들이 말하곤 하는 부단한 노력과 환경의 영향으로 성공적으로 제작된 훌륭한 사람인 것인가? 위 질문에 대한 답은 아래 어린시절의 괴테 스스로가 명확히 하고 있다.          

 


내가 나 자신에게서, 다른 사람에게서, 자연에서 인지하는 것을 시적으로 모작해 보는 것이 나에게는 언제든 가장 큰 즐거움이기는 했다. 나는 그런 일을 점점 더 쉽게 해나갔는데,

그건 본능에서 이루어지며 어떤 비판도 나를 헷갈리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내 이름이 명예롭게 일컬어지라는 확신이 나에게 남몰래 있었다.    


      

그렇다. 괴테는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괴테로 태어났다. 그렇다면 이제 이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 보자. 나는 만들어진 사람가?  아니면 나로 태어난 존재인가?

전자일 경우 존재에 대한, 혹은 존재의 오류를 인정할 수 있게 되지만, 후자에게 있어 내 존재에 대한 의심과 후회는 있을 수 없다. 나를 만든 창조주에 대한 무한한 신뢰와 감사, 수줍게 겸손한 자신감은 우리를 괴테로 태어나게 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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