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에 나타난 충무공의 모든 것
[을미년(1595년) 3월]
초1일(갑술) 맑았다. 겨울을 지낸 삼도 군사들을 모아, 임금께서 내리시는 무명을 나눠 주었다. 정조방장이 들어왔다.
초2일(을해) 흐렸다.
초3일(병자) 맑았다.
초4일(정축) 맑았다. 조방장 박종남이 들어왔다.
초5일(무인) 비가 왔다. 노대해(盧大海)가 왔다.
초6일(기묘) 맑았다.
초7일(경진) 맑았다. 박조방장·신조방장·우후·진도군수가 보러 왔었다.
필자가 가보았던 전라남도 여수와 통영은 이순신의 도시였다. 서울에서 차로 4~5시간을 쉬지않고 남쪽으로 달리다 보면, 곳곳에서 풍기는 비릿한 바다 냄새를 감지하는 동시에 여태껏 살아오면서 보아온 ‘충무공 이순신’이라는 글자를 단 30분 안에 몇 배는 더 자주 마주치게 되는데, 그렇다면 그곳은 이미 여수나 통영 중 어느 한 곳인 셈이다. 특히 지금과 같은 7월의 여수와 통영은 사정없이 내리쬐는 직사광선과 바다의 습한 기운으로 인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자체가 훈련이자 인내가 되어 버리고 만다. 아름다운 풍광을 그저 자랑만 하지 않는 이곳에서 아마도 매일 밤 기름에 흠뻑 적신 심지를 태우며 하루를 돌아보는 글을 썼던 충무공의 지극히 인간적인 면을 이번에는 살펴보고자 한다. 맥락을 사전에 알지 못한다면, 날씨에 유독 집착하는 초등학생의 일기와 크게 다를 바 없이 보이는 윗 글은 성웅(聖雄)이라 불리우는 이순신의 일기이다. 사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난중일기(亂中日記)’는 본래 어떤 이름도 붙어 있지 않았다. 단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달인 5월 1일부터 전사하기 전 달인 1598년 10월 7일까지의 일기형식 기록으로 존재하였는데, 이후 1795년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편찬하면서 편찬자가 편의상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여 사람들이 이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서울 광화문에서의 늠름하고 위엄있는 장수의 이미지가 충무공의 본질이라고 생각할진대, 난중일기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러한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지극히 인간적인 성정(性情)만을 확인할 수 있다. 필자는 언제나 쾌활하고 리더십이 있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강연을 하는 어느 연사의 고백을 잊지 못한다. 그 연사는 사람들 앞에 나설 때마다 너무나도 두려워 식은땀을 흘리며, 정신이 혼미해지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는 대중의 시선을 즐기며, 물속의 수달처럼 너무나 자연스럽게 연설을 하곤 했는데 항상 대중 앞에 선다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니... 충무공도 이 연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난중일기를 보면 쉽게 눈치챌 수 있는데, 분명히 이순신은 그 누구보다 다가오는 전투를, 전쟁을 두려워했음이 분명하다.
20일(기미) 맑았다. 늦게 가리포첨사·금갑도만호·남도만호·사도첨사·여도만호가 보러 왔기에, 술을 먹여 보냈다. 저물 녘에 영등만호도 왔다가, 저녁을 먹고 돌아갔다. 이날 밤에 바람이 몹시 싸늘하고 차가운 달빛이 낮처럼 밝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뒤척였다. 온갖 걱정이 가슴에 치밀었다.
21일(경신) 맑았다. 이설이 말미를 청했지만 주지 않았다. (중략)
바람이 몹시 싸늘했다. 누워도 잠을 이룰 수 없어, 공태원(孔太元)을 불러다 왜군의 정세를 물었다.
난중일기는 아마 충무공의 두려움을 완화시켜주는 진정제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의 매일을 기록하며 마음을 안정시켰고, 원 균(元 均, 1540~1597)과 같은 무능하고 부패한 장수를 신랄히 비판하며 심연(深淵)과 같은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자 하였다. 충무공의 두려움은 왜군들과의 전투에서 ‘비대칭 전력’으로도 나타나는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학익진(鶴翼陣)’이나 ‘거북선’도 이 비대칭 전력 혹은 전략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무조건 적진으로 돌격만 하여 적의 전선(前線)을 흐트러뜨리는 돌격선인 거북선은 자신감이 아닌 두려움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이순신은 이와 같은 두려움과 걱정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자주 병에 시달렸다. 물론 마음의 병으로 몸이 아팠다는 인과는 일기에 나오지 않지만, 완벽주의자에 가까웠던 충무공이 불철주야 종횡무진 하면서 심신이 많이 지치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은 그리 어렵지 않다.
25일(계유) 맑았다. 새벽부터 몸이 몹시 불편해서 종일 괴로웠다. 보성군수가 보러 왔었다.
26일(갑술) 맑았다. 병세가 아주 심해져서 사람을 거의 알아보지 못했다.
난중일기에는 위와 같이 ‘몸이 불편하다’ ‘밤새 신음하며 땀을 흘렸다’ 라는 표현이 심심찮게 등장한다. 우리가 떠올리는 백전백승 이순신 장군의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이 밖에도 일기에는 어머니를 향한 효심과 걱정, 왜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막내아들 '면'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 등 지극히 인간적인 영웅의 심리가 잘 나타나 있다. 그리고 언제나 일기의 첫문장은 그날의 날씨를 기록하는 것으로 고정되어 수군(水軍)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하늘의 상황을 항상 살피는 조선 해군의 유능한 지휘관이라는 것을 굳이 밝히지 않아도 이 글을 읽는 모두가 알 수 있게 되었다.
난중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정작 전체를 한번이라도 읽어본 사람은 드물다. 기개와 호연지기(浩然之氣)의 대명사인 이순신 장군은 알지만, 무인(武人)이면서 국보 제76호이자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이라는 고전, 난중일기를 남긴 ‘인간 이순신’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이렇듯 충무공이 난중일기를 남기지 않았더라면 그의 이면을 후손들은 영원히 알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만약 그가 살아있다면 오늘의 일기는 어떻게 시작했을지 상상해 본다.
‘오늘도 맑았다. 여느 때와 같은 하루였지만, 결전의 날은 다가오고 있다. 준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