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가는 만원 버스 안, 이어폰을 귀에 꽂은 채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날따라 매번 들었던 플레이리스트가 지겨워서, 랜덤 셔플을 돌렸다. 그리곤 아무 생각 없이 창밖을 보던 순간, 빅뱅의 노래가 오랜만에 흘러나왔다.
순간, 내 눈앞에 뽀샤시한 필터가 씌워졌다. 부모님의 MP3 플레이어를 몰래 가져와 학교에서 친구들과 돌려 듣던 초등학생 시절로 소환된 기분이었다. 운동장에서 새로 산 야구배트로 야구를 하다가 5학년 형들에게 빼앗기고 울며 집에 돌아온 기억, 학교 장기자랑 무대에서 빅뱅 춤을 따라 추다가 넘어진 흑역사들이 4K 화질로 재생됐다. 친구들과 쉬는 시간마다 교실 뒤편에서 "내가 지드래곤 할게, 너는 태양 해"라며 밤새 역할분담을 논의하던 장면들까지.
현실은 취업 걱정에 찌든 화석 대학생인데, 뇌 속은 이미 실내화 가방 발로 차고 다니던 초딩이 되어버린 것이다. 고작 노래 하나가 이토록 사람을 무방비 상태로 만들다니. 음악이란 것은 이렇게 가끔씩 불쑥 나타나 머릿속의 버튼을 누르고 사라지곤 하는 것 같다.
그때 문득, 엉뚱하게도 예전에 등산로에서 마주쳤던 어르신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배낭에 꽂은 스피커에서 쩌렁쩌렁 울려 퍼지던 트로트 자락들이 아직도 기억난다. 솔직히 나는 그 소리가 썩 듣기 좋지 않았다. 트로트 특유의 꺾기 창법, 원색적인 가사와 뽕짝 리듬이 나에겐 음악이 아닌 소음에 가까웠다.
하지만 내 이어폰 속 2000년대 초반의 노래가 나를 순식간에 학창 시절로 데려갔듯, 그들에게 트로트 역시 단순한 음악이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듣기에 그저 구성지고 투박한 멜로디일지 몰라도, 그 소리 파동 속에는 그들의 가장 빛나던 시절이 암호처럼 새겨져 있는 건 아닐까. 척박한 산업화 시대를 버텨내야 했던 고단함, 가난했지만 희망 하나로 뜨거웠던 청춘의 연애사, 혹은 자식들 키우느라 잊고 살았던 자신의 이름 석 자가 그 리듬 속에 녹아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음악은 시간을 담는 타임캡슐 같다. 나에게 2000년대 노래가 당시의 공기, 습도, 설렘을 고스란히 불러오는 주문인 것처럼, 어르신들에게 트로트는 현재의 육체를 벗어나 가장 생생했던 과거의 자신과 접속하는 통로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단순히 철 지난 유행가를 듣는 게 아니라, 흘러가 버린 자신의 시간을 다시 만지고 있는 셈이다.
장르와 리듬은 달라도, 그 안에 담긴 그리움의 질량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훗날 내가 백발의 노인이 되었을 때, 나는 아마 지금 유행하는 아이돌 노래나 힙합 비트를 들으며 눈물짓고 있을지 모른다. 그때 젊은이들이 인상을 찡그리며 "할아버지는 왜 이런 시끄러운 기계음을 들으세요?"라고 불만을 토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제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구성진 트로트 자락이 그저 소음으로 들리진 않는다. 그 노래 속에서 어떤 어르신은 지금 막 첫사랑과 데이트하던 종로 거리를 걷고 계시고, 어떤 할머니는 고단했던 하루를 마치고 막걸리 한잔하던 젊은 날의 위로를 받고 계실 수 있다.
타인의 기억을 소음이 아닌, 그 사람의 인생이 재생되고 있는 배경음악으로 해석해 주는 것. 그것이 내가 버스에서 배운, 작은 예의다. 그리고 나 또한 먼 훗날 내 기억을 재생해 줄 나만의 플레이리스트를 지금부터 부지런히 채워 넣어놓으려 한다. 오늘 하루의 치열함도 언젠간 꽤 괜찮은 명곡으로 기억되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