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30분짜리 효자

by 김이밤


서점에서 흘린 휘발성 눈물


얼마 전, 서점에 들렀다가 베스트셀러 코너에 놓인 소설책 한 권에 눈길이 갔다. 표지부터 아련한 수채화풍 그림이 그려진, 가족을 소재로 한 소설이었다. 구석 자리에 앉아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작가의 문장력은 탁월했다. 어머니의 거친 손마디와 자식을 위해 희생한 굽은 등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나의 눈물버튼이 제대로 눌렸다. 서점 안 사람들의 시선도 잊어버리고 훌쩍거릴 만큼, 나는 소설 속 활자에 완벽히 포획당했다.


난 책을 덮자마자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어, 웬일로 연락을 다하고?"


"그냥... 엄마 생각나서. 건강하지? 밥 잘 챙겨 드시고."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나는 마치 소설 속 비련의 주인공이나 뒤늦게 깨달음을 얻은 효자가 된 듯한 기분에 취했다. 하지만 그 문학적 감동의 유통기한은 아메리카노 얼음이 녹는 시간보다 짧았다.


”그래, 근데 너 요즘 방은 좀 치우고 사니? 저번에 보니까 아주 방이 사람 사는 집인지 돼지우리인지. 배달 음식 시켜 먹고 나선 용기 좀 씻어서 버리고... “


어머니의 잔소리 한 방에 내 눈물샘은 순식간에 메말라버렸다. 방금 전까지 내 머릿속을 지배하던 고귀하고 희생적인 어머니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고, 잔소리 폭격을 퍼붓는 현실 엄마가 등판하자 나는 다시 퉁명스러운 아들로 복귀했다.


"아, 알았어. 들어가서 치울게."


그런데 전화를 끊고 나니 묘한 자괴감이 들었다. 방금 내가 흘린 눈물은 진짜 우리 엄마를 향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작가가 정교하게 배치한 형용사와 문장 부호에 반응한 '조건 반사'였을까?





편집된 슬픔


소설이나 에세이, 그리고 예술과 같은 것들은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지만, 동시에 아주 위험한 마법사이기도 하다. 작가는 단어의 선택, 문장의 배치, 서사의 강약을 통해 독자가 '어디서 울고 어디서 분노할지'를 아주 정교하게 디자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정의 디자인이 가장 잔인하게 작동한다고 느꼈던 것 중 하나는 바로 '죽음'을 다루는 언론의 태도다. 우리 사회에는 엄연히 슬픔의 계급이 존재한다.


가령, 불특정 다수가 희생된 대형 참사가 발생하면 대한민국은 거대한 장례식장이 된다. 뉴스는 24시간 애도로 가득 차고, 도심 한가운데 분향소가 차려지며, 특별법 논의가 뜨겁게 달아오른다. 나 역시 그러한 뉴스를 접했을 때, 며칠 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가슴이 먹먹했다. 내 또래, 혹은 내 이웃에게 닥친 그 비극은 남의 일이 아니었기에 나 또한 진심으로 분노했고,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며 눈물을 흘렸다. 그 거대한 슬픔과 애도는 분명 마땅하고 필요한 것이었다.


하지만 카메라 앵글을 아주 조금만 옆으로 돌려보자. 그와 동시에 어딘가에서는 평생 가족을 위해 헌신하다 실직 후 쪽방촌에서 홀로 생을 마감한 중년 가장의 고독사가 있었다. 또 어딘가에서는 학창 시절의 폭력 피해로 인한 우울증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잘못된 선택을 한 어느 여성의 죽음도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죽음은 뉴스 하단에 흐르는 한 줄짜리 자막, 혹은 사회면 구석의 단신으로 처리될 뿐이다. 여기에는 추모 인파도, 특별법도, 전 국민적인 눈물도 없다.


생명에는 경중이 없다는데, 왜 죽음의 무게는 이토록 다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주된 원인 중 하나는 '공포의 전이성'에 있다고 본다. 대형 참사는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불행'이기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고 이입한다. 하지만 고독사나 개인적인 비극 등은 '나와는 먼 이야기'로 치부하기 쉽기에 대중의 감정적 동요가 적다. 언론은 이 본능을 교묘하게 자극하여 '잘 팔리는 슬픔'만을 메인 뉴스에 배치하고, 그렇지 않은 슬픔은 가차 없이 편집해 버린다.





'신문 귀퉁이'를 읽는 사람이 되겠다


이러한 미디어의 메커니즘을 깨닫고 난 뒤, 나는 세상이 강요하는 슬픔에 무작정 동참하는 걸 경계하기 시작했다. 남들이 다 운다고 해서 따라 우는 것은 공감이 아니라 '감정의 하청'일뿐이다.


나는 화려한 조명이 비추는 메인 무대보다, 카메라가 비추지 않는 무대 뒤편의 어둠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려 한다. 예를 들면, 포털 사이트의 '가장 많이 본 뉴스' 대신, 신문 사회면 가장 구석에 박힌 작은 기사들에 시선을 잠시 머무는 것도 그러한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시청률이 나오지 않아 편집된 누군가의 억울함, 클릭 수가 되지 않아 묻혀버린 소외된 이웃의 부고도 존재한다. 도심의 거대한 분향소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것도 의미 있지만,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그 작은 이름들을 기억하고 애도하는 것이야말로, '보여주기식 정의'가 판치는 세상에서 내 '감정의 주권'을 조금이나마 지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믿는다.


나의 슬픔, 나의 분노, 나의 애도는 가능한 한 나의 시선으로 결정하고자 한다. 미디어가 떠먹여 주는 감정의 이유식만 편식하지 않고, 내가 직접 씹고 삼켜 소화한 진실도 함께 내 마음의 밥상에 올리겠다. 그것이 이 거대한 연출된 사회에서 '주체적인 관객'으로 살아남는 길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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