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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Mar 24. 2021

이상화 망상에 시달린다는 것

‘조울증’이란 말을 처음 알게 된 건 만화책을 보면서다. 친척 언니 집에서 배를 깔고 누워 천계영의 만화 ‘오디션’을 보는데 거기 나오는 주인공인 ‘황보래용’이 조울증을 앓는 캐릭터였다. 울의 상태에서는 아무 말 없이 학교에서 내내 눈물만 흘리고 쓰러져 있는데 조의 시기가 오면 노홍철 저리 가라 하이 텐션으로 온갖 깨방정을 떨고 세상일에 간섭하며 나대고 다닌다.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그땐 내가 커서 황보래용 만큼은 아니지만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마냥 조와 울의 모드로 스위치를 껐다 켰다 하며 살아갈 줄 몰랐다.



다시 보니 기분이 울적하거나 무기력한 상태에서 발랄해지는 건 비교적 스위치가 탁 켜지는 일이다. 조금만 노력하면 적어도 의식의 수준에서 언제 어떻게 기분이 좋아지게 되었는지 관찰할 수 있다. 반대로 울적해지는 과정은 그라데이션 같다. 스멀스멀 조금씩 물들어가는데 발원지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고, 정신 차려보면 온통 새까맣게 변해버린다. 그럼 마치 원래부터 내가 새까만 존재처럼 느껴진다.



“글이 잘 써지지 않아서 그런 거 아니야? 할 일은 많은데 마음처럼 안 돼서?”

김혜진 전문 박사 학위를 지닌 남편이 추측했을 때 동의할 수 없었다. 역시 반쪽짜리 전문가였군. 시시콜콜 이야기를 제공해주지 않으면 분석 결과가 하나도 안 맞잖아. 정보 수집 영역이 아주 형편없어. 그런데 압축해서 말했지만 결국 전문가 의견에 일리가 있었다. 이번에 꽤 오래 침울했던 이유는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옛날 버릇이 나왔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생활에 변화는 없다. 그러나 작가가 되자고 쓰는 사람이 되자고 결심한 부분이 생각보다 더 부담되는 일이었나 보다. 공모전 준비도 아니고 마감 기한도 없고 누구 하나 갈구고 비판하는 사람 없는 건 매한가지인데, 단지 ‘취미로 쓰고 싶을 때마다 글을 쓰자’에서 ‘각 잡고 제대로 몰입해서 글을 써보자.’라고 마음먹는 것만으로도 생활의 균형이 다 깨져버렸다.



생활의 균형이 깨지면 본능적으로 평소 가장 자주 써먹던 사고회로가 자동으로 발동된다. ‘자신의 이상화’ 혹은 ‘일상의 이상화’, ‘나만 아니면 돼.’ 벌칙을 피하려는 말이 아니라 ‘내가 사는 이 세계만 아니면 돼.’ 스스로에 대한 부정, 내 일상에 관한 부정이 된다. 언젠가부터 그랬다. 내 삶이 뭔가 어긋나고 잘못되었다는 망상, 분명 현실 세계 너머 어딘가에 내가 도달할 수 없는 조금 더 나은 세계가 있을 거라는 잔혹한 희망을 품고 살았다. 타인의 세계가 궁금했고, 타인의 시선이 알고 싶었다. 내 세계가 아닌 내 일상이 아닌 다른 이의 인생을 살고 싶었다. 굳이 훌륭할 필요도 없고 굳이 특별할 필요도 없었다. 단지 나만 아니면 그 어떤 세계라도 괜찮았다.


그렇게 되면 일상의 감각이 하나둘씩 죽기 시작한다. 특별히 무언가 불만족스러워도 아니고 원하는 걸 갖지 못했기 때문도 아니다. 구체적인 불평 같은 건 없다. 그저 막연히 이 세계가 내 삶이 통째로 싫을 뿐이다. 이 세계의 어느 작은 부분 하나가 좋다 한들 행운이 하나 주어져도 결국 이 삶을 주도하며 사는 건 변함없이 별로인 나이기 때문에 소용없다.




정체되고 싶진 않다. 늘 변화하고 성장하고 싶다. 다음의 단계를 가고자 하는 마음은 선뜻 무언가 도전하고 모험하는 태도는 소중하다. 꿈이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건 행복하고 건강한 일이다. 그것이 욕심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분명 나 역시 다음 단계를 위한 한 발을 더 내딛겠다는 긍정적인 의도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를 일상에 봉합하는 과정에서는 늘 길을 잃기 쉽다. 표면적이든 내부적이든 이전과 같을 수는 없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과정은 언제나 어렵고 헷갈린다. 간신히 끌어올린 에너지와 의식적으로 통합했던 나의 자아와 세계의 관계는 나아가려고 할 때마다 다시 흔들리고 말 것이다.



그렇게 이전에 형편없는 나 자신과 생활이라는 망상에 빠져들 때는 어쩔 수 없이 세계를 좁혀야 한다. 세계와 연결이 끊어질까 두렵더라도 나 혼자 소외될까 걱정이 되더라도 내면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존재하지 않는 관객들을 내보내고 이상화 대상으로 삼을만한 멋지고 부러운 타인 찾기를 그만두고, 어쩌면 더 나은 버전의 내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오만함을 죽이고, 저 너머의 유토피아를 그리워하는 청승맞은 향수병도 몰아내야 한다. 다시 또 나를 죽이는 작업을 해야 한다.




이렇게 살면 어떠한가? 이게 끝이라면 또 어떠한가? 이게 나의 최선의 버전이고 이 지루하고 심심한 일상이 내 본질의 반영이고 아무것도 더 창조할 수 없다 한들 뭐 어떠한가. 내가 우주에서 최고로 쓸모없는 인간이면 어떠하고 결국 내 삶은 이게 다였던 거로 판명되고 더 나아질 게 없다 해도 뭐 어떠한가? 그래도 문제 될 건 없다. 슬퍼할 이유는 없다.


너 대단한 사람 아니야. 특별한 사람도 아니고. 더 나은 네가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 그거 놓으면 엄청 편해. 



최근에는 연결에 집착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이 아닌 더 많은 연결을 원했다. 이름 모를 타인은 언제나 풍부하고 재밌고 흥미로운 연결이 있는 삶을 살고 있었다. 나만 빼고 모두 다. 그 타인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래서 다시 툭 놓기로 했다. 다행히 봄볕이 좋아 산책하러 나갈 수 있고 하늘은 파랗고 꽃이 피어 있다. 벙거지를 쓰고 엉망진창으로 편안하게 입고 양손으로 가득 바람을 느끼며 새소리를 듣는다. 내가 다시 생각이 많았구나. 일상의 감각이 조금씩 살아난다. 창문 너머 풍경이 모두 사진 같고, 길거리의 이름 모를 다른 사람을 사랑의 눈으로 다시 볼 에너지가 생긴다.



문득 생각난 친구에게 카톡 하나를 보냈다. 너무 오래 연락하지 않아서 미안한 마음이었는데 친구는 오히려 자기가 먼저 연락하지 않아서 미안하다고 말했다. 다음 주에 만나기로 했는데 진짜로 너무너무 친구가 보고 싶었다. 아 이게 사랑의 감각이었지. 수많은 연결은 필요치 않다. 특히 내가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가져야 한다고 믿는 그 허상 같은 연결은 더더욱. 이상화를 죽이고 다시 일상을 봉합하자. 정말 완연한 봄이다.




P.S. 다시 행복 모드, 행복 모드를 누리겠습니다. 많이 만나고 많이 보고 많이 써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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