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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May 31. 2021

아래층에서 물이 샌다

골치 아픈 일이 생긴 것 같아

골치 아픈 일이 생긴 것 같아.



남편이 난처한 어투로 말했다. 아래층에서 연락이 왔단다. 물이 샌다고. 그러고 보면 작년에도 얼핏 경비 아저씨를 통해 아래층 천장에서 물이 샌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경비아저씨는 연신 죄 없는 싱크대를 살펴보더니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싱겁게 돌아섰다. 그 이후 따로 연락이 오지 않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물이 새는 건 우리 집이 아니었기 때문에.


올해는 봄부터 장마처럼 비가 내렸다. 더는 참을 수 없었는지 아래층 사람이 드디어 우리 집 현관을 두드렸다. 나는 막 세수를 하던 참이었다. 급히 물기를 닦고 밖으로 나갔다. 걱정이 많지만, 부드러운 말씨를 쓰는 우리 엄마 나이의 한 아주머니가 보였다. 자신의 거실에서 작년부터 물이 샌다고 말했다. 나는 언제 이사 왔는지 언제부터 물이 새기 시작했는지 하나씩 물었다. 아래층은 혹시나 해서 베란다 실리콘 공사를 해보았지만 소용없었다고 한다.


보통 물이 새는 건 거의 윗집에 원인이 있다고 했다. 목요일에 검사해줄 업체 사람을 불렀으니 그 시간에 집에 있어 달라고 부탁했다. 예상보다 이성적이고 협조적인 그분을 보고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알겠다고 대답하고 얼마나 고생이 많냐고 함께 걱정을 해줬다. 한층 누그러진 표정이 된 아랫집 아주머니는 '아유, 고생은 무슨.' 이라고 대답하며 우리 집을 떠났다.


다음날 급한 일을 처리하는 도중에 다시 한번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아래층 그분이었다. 예상치 못한 방문에 조금 짜증이 났다. 그분은 전날과 달리 무언가 결심한 표정이다. 다짜고짜 하소연하더니 자신의 집으로 날 데려갔다. 상상했던 것만큼 물이 뚝뚝 떨어지지 않았지만, 거실 중간 작은 대접에 물이 고여있었다. 상당히 거슬리고 귀찮았을 것이다. 거실 벽면에  곰팡이가 피어있었다.


처음 알아본 업체에서 너무 많은 서류 작업을 요구해서 다른 업체를 알아보게 되었다. 그 업체로부터 '근데 그걸 왜 아줌마가 신경 써요? 위층이 해결해야지.'라는 소리를 들었단다. 나는 그 자리에서 알겠다고 말하면 혹시나 독박을 쓰게 될까 봐 집주인과 남편에게 연락해보고 확답을 주겠다고 말했다. 연락처도 교환했다.


집에 와서 급한 일을 처리한 후, 남편에게 말하고 인터넷을 뒤져보았다. 이제까지 원룸에 살아서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인터넷을 찾아보고 아주머니에게 미안해졌다. 물이 새는 경우 거의 위층에 원인이 있을 확률이 80~90%였고, 위층이 적극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거나 적어도 원인을 파악할 의무가 있었다.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는 아래층 아주머니가 참고 견딘 꼴이었다.



무지가 죄송했다. 위층에서 더 적극적으로 발 벗고 나서야 했던 건데, 내 일을 방해한다고 아줌마를 귀찮아했다. 혹시나 우리가 손해 보는 꼴이 될까 봐 날을 세우고 의심한 셈이 되었다. 아래층 덕분에 하나 더 배웠다. 아래층에서 물이 새면 윗집이 신속히 해결해준다. 속으로 얼마가 깨질까 계산을 해보고,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아까워하지 말자고 생각을 했다.


인터넷을 더 찾아보니 세 들어 사는 경우, 집주인이 비용을 부담하는 게 관례였다.  남편은 집주인에게 연락했다. 우리 집 베란다에서 물이 샌다고 말했을 때는 참고 살라고 말했던 집주인은 아래층에서 항의하자 엉덩이를 움직였다. 관리소 측에 연락하고 조율을 했고, 업체에 연락해서 실리콘 방수 작업을 해주기로 했다.


나와 남편이 더는 신경 쓸 일은 하나도 없었다. 당연히 돈도 집주인이 부담했고, 연락도 알아서 했으며, 업체의 공사도 밖에서 작업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굳이 일정을 맞출 필요도 없었다. 내가 신나게 종일 밖에서 놀고 돌아온 어제, 업체에서 꼼꼼하게 실리콘 방수 작업을 했다고 한다. 서울에는 비가 왔지만 내가 사는 곳엔 운 좋게 비가 오지 않았고, 오늘 아침 쨍쨍한 햇볕이 실리콘을 바짝 말렸다.


오늘 저녁 갑자기 천둥과 벼락이 치고 마구 비가 쏟아져 내렸다. 실리콘 작업을 한 베란다에서 더는 물이 새지 않았다. 비가 새지 않으니 더는 수건으로 물길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흙투성이 물에 젖은 수건을 열심히 빨래할 필요도 없었다. 냉장고 쪽으로 물이 샐까 봐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삶의 질이 한결 높아졌다.


그날 아래층 아주머니가 두드린 노크 소리는 불안도 재앙도 아닌, 오히려 선물이었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집주인과 언쟁을 벌일 필요 없이. 아주머니 덕에 아무 노력 없이도 공짜로 집을 고쳤다. 종종 이런 일이 생긴다. 부정적인 일로만 여겨진 일이 사실 지나고 보면 내게 한없이 좋은 일로 탈바꿈되는 상황. 그러니 무언가가 도착하면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얼굴을 구길 필요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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