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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Jun 16. 2021

그는 나와 다른 현실에 살고 있다.



K 언니를 약 1년 반 만에 재회한 건 소소한 우연 덕이었다. 갑자기 당근마켓으로 물건을 사게 되었고 마법사님이 차를 태워 주셔서 정류장에 일찍 도착했고 막 정류장을 지나갈 무렵 가까스로 판매자에게서 일찍 만나도 좋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그의 집 앞에 앉아 그를 기다리던 중인데 갑자기 핸드폰 화면에 K 언니 이름이 떴다. ‘지금 어디야?’라는 질문에 역 근처라고 대답했더니 자신도 그 부근을 지나가고 있다고 신기하다며 잠깐 얼굴이라도 보기로 했다.



밝은 얼굴로 오랜만에 만나서 너무 반갑다며 내가 덜컥 포옹해버리자 K 언니는 난감한 얼굴로 냄새가 날거라고 말했다.


K 언니는 지금까지 유일하게 연락하는 대학 시절 동기이다. K 언니에겐 고마운 기억이 많다. 자기 비하에 늘 시달리던 내게 ‘넌 정말 똑똑하고 대단하다’고 말해주고, ‘너 같은 사람이 다니기 때문에 이 학교도 제법 괜찮다’고 말했다. 그럴 때마다 언니가 나에 대해 지나치게 좋은 오해를 많이 하고 있다고 말했다. 언니는 나의 시니컬한 블랙 유머를 좋아했다.



반면 난 생활력이 강한 언니가 대단하고 부러웠다. 언니는 나와 달리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는 착실한 사람이었다. 알바를 척척 구하는 것도 전혀 상관없는 전공으로 대학원을 다닌 것도 해외에서 회사 생활을 한 것도 꿈을 꾼 것도 돌아와서 묵묵히 회사에 다니는 것도 모두 대단하게 느껴지고 언니를 볼 때마다 가끔씩 양심에 찔릴 때도 있었다.


언니에게 Mi Cubano를 선물하자 언니는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 칭찬했고, 글을 읽고 나서 ‘OO이는 글로 표현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나를 알아줘서 감동을 준 동시에, 책 하나 냈으니 되었다고 작가로 벌어먹을 수는 없다고 이제는 정신 차리고 공무원 준비라도 하라고 말했다.



오랜만에 만난 언니는 걱정과 시름이 가득해서 인생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동안 투자도 부동산도 관심 없던 자신이 너무 안일했다고 자책했다. 그는 집에서 더는 견딜 수 없어 집을 나와야 하는 상황인데 집 값이 장난 아니라고 했다. 그리고서 매물을 찾으면 당장 빨리 집을 사라고 말했다.


나와 우리 가족의 안부를 물었다. 요새 아주 행복하고 L 군 과도 변함없이 잘 지내고 카페 운영을 준비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얼마 안 되는 시간 내 얘기를 듣더니 그는 ‘결혼 적령기에 결혼해도 바라고 원하는 건 끝이 없구나.’하고 내 삶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버렸다.


그에게 삶은 늘 투쟁이었다. 경쟁이고 쟁취였다. 가끔 좋은 이야기를 해줬지만, 그는 늘 누군가를 판단하는 데 익숙했다. 내가 알아채기도 전에 나보다 먼저 살이 쪘다고 말해주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는 나를 좋아했다. 내게 유용하고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정보도 아낌없이 나눠주었다.


그를 골똘히 바라보며 생각했다. 삶은 투쟁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걸 반영하는 거울일 뿐이야. 우리는 삶의 창조자야. 우린 삶을 경험하는 것뿐이야. 우리가 원하는 거로 채울 수 있어. 요즘 나의 최대 고민은 모두 ‘20세기 소년’ 그러니까 카페와 커뮤니티에 관련한 것뿐이다. 두 달 전만 해도 글쓰기에 대해 고민을 했던 것도 같고, 언젠가는 매일 회사에 다니기 싫어 회사와 관련한 고민을 했고, 어쩌면 K 언니처럼 암담한 부동산 상황을 걱정하며 하루를 채워도 이질감은 없다. 나의 하루는 뭐든 될 수 있다.



그는 가족이 아프고, 가족 때문에 골머리를 썩이고 있고 자신은 영영 집 문제로 고통받을 팔자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물론 그 팔자를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든 빠른 시일 내로 집을 구할 계획이라 말했다.


그는 헤어지는 전에 ‘아름답고 예쁜 생각을 하는 건 좋지만 현실을 보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와 말하면서 몇 번이나 웃고 농담을 던졌지만, 그는 함께 웃지 않고 심각했다. 나는 그가 바라보는 현실과 다른 현실에 산다는 그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나는 회의적이고 부정적이고 절망하던 시절 K 언니를 만났고 K 언니를 좋아했다. 이제 그와 나는 너무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가 적당한 집을 매매해서 안정감을 얻으면 좋겠지만 내가 아는 그는 집 문제를 해결해도 다음 문제로 결핍과 불안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와 헤어져 가는 길에 지금 내가 ‘20세기 소년’ 프로젝트로 고민하는 게 너무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낭만에 젖어 철 없이 사는 내가 걱정되겠지만 나는 내 삶이 너무 좋고 하나도 걱정되지 않고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행복해지고 더 많은 사랑을 할 거란 걸 안다. 매일 신나고 즐겁고 기쁘고 설레게 살 것이다. 고민과 걱정이 생겨도 잠시 잠깐뿐이다. 세상을 만드는 건 나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않을 거다. 사는 건 선물이고 즐거운 거다.


그는 오늘 파란 하늘을 수 놓은 뭉게구름을 봤을까? 아마 나는 다시 K 언니를 마주치지 못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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