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트러진 트렁크

리스본 여행 에세이 #11. 페소아의 집

by 최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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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걸을 수 있다는 기분이 들자 막 출발하려는 전차를 보고도 쫓아가지 않았다. 그렇게 28번 전차 한 대가 떠났다. 아무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차를 놓치면 언제나 문제가 생기곤 했었다. 서울에서는 그랬다.


프라제르스 묘지를 나서 길을 걸었다. 관광지가 아닌 탓에 거리는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그 특징 없는 거리 위로 그곳에 사는 이들의 모습을 마주했다. 양손에 아이를 잡고 걷는 배 나온 아저씨. 유모차에 아이를 태운채 허름한 노천카페에 앉아 잠시 차를 마시고 일어나는 여성. 각기 다른 눈동자 색으로 함께 걷는 학생들. 이방인은 나밖에 없었다. 그래서 관찰하게 된다. 특징 없는 카페에 앉아 비카를 마시며 타인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된다. 언젠가 페소아가 그랬던 것처럼.


페소아는 타인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그에게 타인은 관찰의 대상이자 노래의 원석이었다. 그는 리스본 거리를 쉴 새 없이 걸었고, 만나는 이들과 편하게 대화를 나눠다. 다만 거기에 페소아는 없었다. 그는 한 발 뒤로 물러나는 인물이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의 집을 아는 이들도 거의 없었다. 아무리 친한이라 하더라도 그의 집에 초대를 받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리스본 전체가 자신의 무대라 생각한 그에게 있어 ‘카페 브라질레이라’, ‘다 아르카다 식당’을 비롯한 곳곳이 자신의 거실이자 응접실이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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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그의 집에 간다. 죽어서야 문이 열리고 초대장이 만들어진 페소아의 집. 이곳은 그가 말년을 보낸 마지막 집이다. 외벽부터 페소아에 관한 글이 적혀 있는 이 집의 문은 항상 열려 있다. 그래도 페소아의 내면적인 성격을 기억한다면 문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여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집으로 들어선다. 집은 예상대로 조용하다. 박물관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감탄사보다는, 도서관에 가득한 정적의 공기가 먼저 느껴진다. 그것은 아마도 관광지 하나 없는 이곳을 일부러 찾는 이방인들이 페소아를 닮았기 때문이리라.


정적의 공기와 달리 이곳에 정해진 룰은 없다. 1층의 친절한 직원에게 각층의 구성을 설명받는 것을 제외하면 그다음부터는 자유다. 꼭대기부터 내려와도 좋고, 보고 싶은 층만 가도 좋다. 아무 계획도 없이 부유하듯 헤매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쩌면 그것이 페소아와 페소아의 리스본을 즐기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렇게 그의 방을 구경한다. 그의 실제 모습을 담은 입간판 사이에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커다란 모니터에 띄워진 그에 관한 문제를 맞히기도 한다. 그렇게 만남을 이어가다 어느 문을 나서면 난간이다. 그곳에 기대서면 페소아가 다가온다. 알마다 네그레이루스의 그림 속에서.


두 권의 <오르페우>를 테이블에 두고 턱시도와 실크헤트를 쓴 페소아. 그는 문학을 향한 열정을 표현한 듯 강렬한 붉은 배경에서 꼿꼿이 허리를 편 채 테이블에 앉아 있다. 그 거대한 그림을 난간 위에서 물끄러미 내려본다. 마치 그의 테이블에 여전히 불이 켜진 것만 같다. 그리고 말하는 것 같다.

“조금만 기다려 주시오.”

아직 그의 작업은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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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소아의 요구대로 만남은 조금 미루고 그의 방으로 향한다. 꼼꼼히 살피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지도 모를 구석에 있는 페소아의 방. 그곳에는 일인용 침대와 옷장. 작은 협탁이 놓여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문 옆에 놓인 커다란 트렁크가 보인다. 트렁크 안으로는 그의 원고를 복사한 종이가 넘치게 담겨 있다. 원한다면 어느 것 하나를 들고 읽어봐도 무방하다. 페소아도 가끔은 그랬을 테니까.


그는 생전에 원고를 쓰면 이 트렁크에 넣어 두었다. 지금은 리스본의 동의어로 페소아를 말할 정도로 명망 높은 그가 원고를 트렁크에 담아 두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생전에 책으로 발표한 작품은 <메시지>가 전부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나머지 원고가 담길 상자가 필요한 것은 당연했다. 그대로 흐트러져 있기에 그의 방, 그의 테이블은 너무나 작았다.


트렁크가 발견되었을 때, 리스본은 흥분했다. 페소아의 입장에서 본다면 너무 늦은 흥분이었다. 트렁크 속 원고는 곧장 연구자들에 의해 분류되었다. 페소아는 그들의 작업을 도와주지 않았다. 목차나 제목, 순서도 분류해두지 않았다. 그저 쓰고 흐트러뜨릴 뿐이었다. 청소되지 않은 그의 책상과 트렁크는 그의 책을 만나기까지 오랜 시간을 요구했다. 연구자들은 오랜 청소 끝에 분류를 마쳤지만, 그것을 완벽하다 말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스스로 진동하는 <불안의 책> 혹은 <불안의 서>로 불리는 책이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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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으로 내려가 페소아들을 만난다. 테이블에 앉은 페소아, 길을 걷는 페소아, 담배를 문 페소아… 이제는 그림과 사진으로밖에 만날 수 없는 그와 마주한다. 다행히 그림은 품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해 오랫동안 보고 있어도 다 담을 수 없어 좋았다.


마지막으로 기념품을 파는 곳을 들른다. 페소아를 기억할 물건을 고른다면 이곳이 적격이라는 듯 다양하고 잘만들어진 물건이 가득하다. 그중에서 한 권의 책을 고른다. 제목은 <Lisboa : What the Tourist Should See>이다. 이 책은 페소아가 쓴 리스본 가이드북으로 트렁크 속 원고 중 유일하게 목차와 순서가 정리된 것이었다. 페소아는 이 책을 시작으로 리스본, 그리고 포르투갈을 알리려 했다. 과거의 영광은 차치하고라도 포르투갈이 스페인의 한 지역으로 알려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거대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물론 그의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포르투갈은커녕 리스본을 소개한 이 원고도 그의 사후 100주년인 1988년이 되어서야 출간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구 흐트러진 원고 더미 속, 정갈히 타이핑되어 엮어둔 이 책의 원고를 생각하면 페소아의 테이블, 그리고 트렁크 속에는 문학과 리스본만이 담겨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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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소아의 집을 나선다.

갑작스레 넓은 공원이 등장한다. 벼룩시장이 열렸는지 사람들이 분주히 트렁크를 열어 물건을 진열하고 있다. 구경을 갈까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발길을 돌려 공원 안 빈 벤치에 앉는다. 이미 난 트렁크 가장 깊은 곳에서 발견한 좋은 물건을 샀다.





글 | 최동민

제작 | Studio 1.9.8.4

메일 | groscalin8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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