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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했어

네가 빼앗은 건 카드지갑뿐이야 #1

by 최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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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부터 약속이 있다면 미리 나가는 편이었습니다. 약속 장소에 늦게 도착해 이미 도착한 친구들의 집중된 시선을 받는 것이 왠지 모르게 간지러웠기 때문이었죠. 그래서 되도록이면 먼저 도착해 차례차례 도착하는 친구들에게 “안녕” 혹은 “여어-“ 정도로 인사를 했습니다.

그렇게 일찍 나가다 보니 남는 시간이 많았습니다. 당시엔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이라 멀뚱히 선 농구대를 바라보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친구 중 유일하게 농구공을 가진 아이는 약속 시간을 지키는 법이 없었죠)

그것이 싫지는 않았습니다. 친구들은 언젠가 도착할 테고 혼자만의 시간이 주는 여유랄까요? (물론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만한 나이는 아니었지만) 그런 것을 즐겼습니다. 말하자면 지금과 같은 시간이죠.


사실 지금 저는 시간관념이란 것을 잃은 지 오래입니다. 먼 나라를 향하는 비행기를 탔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죠. 오늘이 며칠인지, 또 지금은 몇 시인지… 시계를 봐도 실감이 되질 않았습니다. 시계에서 눈을 돌리고 분만실에서 챙겨 온 당신의 물건을 입원실에 풀어 정리했습니다. 꼬박 이틀은 묵은 옷가지들을 풀어놓자 지난 시간의 기억이 정리안 된 중고 앨범 박스를 뒤지는 것처럼 불쑥불쑥 튀어나왔습니다.

그런 생각들에 손이 잡혀 짐 정리는 더디게 이어졌습니다. 언제 당신이 회복실에서 나올지 몰랐기에 마음이 조금 조급해졌습니다. 하지만 한 번 떠오른 생각을 멈출 도리는 없었습니다. 오래된 상자 속 물건들을 하나씩 다 살펴보기 전에는 박스 뚜껑을 닫을 수가 없듯이 말이죠.


이전까지 저는 기억의 시간은 상황의 강도와 비례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쁘면 기쁠수록, 슬프면 슬플수록, 고통스럽다면 또 고통스러울수록 그 기억은 오래 남는다고 생각했던 것이죠.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분명 더 기쁜 시간도 있었고 분명 더 고통스러운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순간, 가장 오랫동안 꺼내본 기억은 ‘찰나’라 불러도 좋을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당신은 우리 둘을 위한 2인용 소파에 누워있었습니다. 이 소파에 정원이 넘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나와 당신 말고는 앉을 이가 없었으니까요.(물론 우리의 고양이 가족 에밀과 로맹은 예외입니다.) 당신은 그곳에서 거실 창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잎이 짙어지기 전의 푸른 나무가 높게 서있었고 때마침 바람도 적당히 불었죠. 당신은 그곳을 보면서. 아니, 딱히 목적의식을 가지고 본 것은 아니기에 “보면서”라고 말하기보다는 “머물면서”가 더 정확하겠군요. 그렇게 그곳에 머물면서 가끔은 책장을 가끔은 커피를 또 가끔은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느긋한 박자에 맞춰 오르고 또 내리는 아이가 같은 소파에 앉아 있었죠. 아직은 당신의 뱃속에서 말입니다.

그렇게 정원을 맞춰 채워진 2인용 소파에 누운 당신과 아직 나지 않은 아이의 파동. 저는 그것을 가장 오랫동안 꺼내보았습니다.



“도착했어”

뒤늦게 걱정하고 있을 지인들에게 문자를 썼습니다. 태어났다는 말을 쓰다 지우고 다시 쓴 글이었습니다. 태어났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죠. 당신도 아마 나와 같지 않았을까요? 만지면 터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할 정도로 믿기지 않는 몸을 내밀며 세상에 나온 아이. 그 아이는 정말이지 우리의 세상 밖, 우주를 헤매고 또 노닐다 나와 당신의 품에 도착한 것만 같았습니다. 그렇기에 “태어났다”는 문자를 쓸 수 없었던 것이었죠.


지인에게 문자를 보내고 다시 고요해진 입원실 침대에 걸터앉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어쩌면 지난 열 달의 시간 동안 조금 긴 마중을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주를 가로지른 긴 항해를 마친 아이, 이현이 잠시 닻을 내리고 쉬어갈 포트 앞에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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