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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미네 집

네가 빼앗은 건 카드지갑뿐이야 #8

by 최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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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활 사진가가 있었습니다. 그에게 큰딸이 태어나죠. 이름은 윤미였습니다. 사진가의 렌즈는 자연히 윤미에게로 향했죠. 그리고 윤미의 하루를 그녀가 결혼을 할 때까지 꾸준히 기록했습니다. 그런 사진가이자 아버지인 전몽각 씨의 기록은 책이 되어 나왔습니다. 이 책은 1990년에 출간이 되었고 나오자마자 1,000부가 팔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절판이 되고는 20년이 지난 2010년에 다시 재출간이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지인에게 바로 그 책 <윤미네 집>을 선물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 장씩 천천히 넘겨보았습니다. 사진의 배경은 한국의 60~80년대였습니다. 그 오래되고 낡은 배경 안에는 오늘 바로 담은 듯한 감정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감정을 한 장씩 마주하며 쉽게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그 사진에 담긴 마음, 그것을 이제는 알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간접 경험’

그런 말을 자주 듣고 또 하곤 했습니다. 어린 시절 무협지와 판타지 소설부터 시작한 독서 경험이 나이가 들어서도 유지가 되는 바람에 저는 책으로 다양한 세상을 만났습니다. 그것은 엉덩이가 무거운 저에게는 퍽 도움이 되는 일이었죠. 그래서 누군가 책의 장점을 물을 때, 간접 경험을 해주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것으로 저의 부족한 활동성에 핑계를 댈 수도 있었죠.

이런 ‘간접경험’의 굳건한 성이 무너진 것은 한 달 정도 떠난 터키 여행 때였습니다. 외국이라고는 일본에 한 번 가본 것이 전부였을 때, 운이 좋거나 겁이 없게도 조금 긴 터키 여행을 떠나게 되었죠. 사실 터키에 대해 아는 것은 2002 월드컵 3,4위전의 상대였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여행을 떠나기 전에 그곳의 역사나 문화를 소개하는 책을 몇 권 읽었습니다. 낯선 경험을 하자! 며 호기로운 결심을 했지만 아무런 준비도 없이 낯선 경험을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으니까요.

그렇게 몇 권의 책을 읽자 어느 정도 터키에 대해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책이 주는 간접 경험은 이렇게나 유용한 것이었죠.


터키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한밤 중에 도착한 터키는 책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아니, 달랐다기보다는 책은 정말 터키의 일부만을 보여줬던 것이더군요. 예를 들어 한밤 중 도착한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은 한 번도 생각지 못한 냄새가 나는 곳이었습니다. (냄새라고 해서 안 좋은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저 사전적 의미의 냄새입니다) 한국에서는 맡아보지 못한 냄새, 그리고 터키의 책에서도 소개해주지 않았던 냄새. 그것은 “간접경험? 그딴 걸로 우릴 다 알았다고 생각했어?”라며 저를 나무라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그 순간 책에서 배운 터키를 지워버렸습니다.



아이를 낳기 전, 그때 <윤미네 집>을 봤다면 어땠을까요? 이런 단순한 생각을 해봅니다. 아이를 낳기 전이지만 아이들이 나오는 소설은 꽤 읽었고 심지어 으스스한 출산과 아이의 이야기가 나오는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도 읽었습니다. 이 정도면 아이를 가진 부모의 마음. 그 정도는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라 판단했을 것입니다. 간접 경험에 불과하더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터키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그 정도의 간접경험으로 아이를 가진 부모의 마음을 알거나 이해하거나 공감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여행 정도가 아니라 아이잖아요!) 그렇기에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이 책을 봤다면 꽤나 빠르게 책장이 넘어갔을 것입니다.


다행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책을 그 아름다움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시기에 만났다는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사진 속 커가는 윤미의 모습은 막연히 상상으로만 그리던 내 아이의 성장기를 조금 더 선명히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장의 결혼사진에서는 작가와 감정이 동화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정확한 간접경험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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