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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가 내리던 날

프로젝트 100 '오늘 하루, 단어' 오프모임을 마치며...

by 최동민


연남동에는 아주 괜찮은 쌀국수집이 있습니다. 합정동에도 있는 가게인데 그곳은 언제나 줄을 서서 먹어야 할 정도로 인기였죠. 다행히 연남동의 이 집은 한적한 거리에 위치해서인지 줄을 설 필요가 없었습니다. 쌀국수 육수의 짭조름한 냄새에 발이 끌리면 자연스레 문턱을 넘을 수 있는 그런 곳이었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최근에는 통 들르지 못했습니다. 원래는 자주 이용하던 녹음실이 근처에 있어서 가던 곳인데 최근에는 녹음일도 줄고 해서 그런 것이었죠. 그래서인지 오늘은 들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쌀국수를 먹기 위해 억지로 그곳에 가지는 않겠지만요.


쌀국수집. 아니, 행사 모임 장소가 있는 연남동으로 가는 길은 일요일 낮치고는 차가 많이 막혔습니다. 그래서 도착 시간에 30분이나 늦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젯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아무래도 괜찮겠지.”라며 쉽게 생각한 것이 화근이었죠.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래도”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는 이 긴장감을 해소할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긴장의 원인은 ‘모임’이었습니다. 몇 달 전, ‘프로젝트 100’이라는 프로그램에 ‘오늘 하루, 단어’라는 프로젝트의 매니저로 시작했습니다. 100일 동안 매일 약속한 일(제 프로젝트의 경우에는 나의 하루를 말할 수 있는 단어를 남기는 것이었죠)을 하는 프로젝트였고 그 사이 오프라인 모임을 한 번 진행해야 했습니다. 이 어마어마한 숫자가 줄어들고 줄어들어 한 줌 정도 남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만 같아서 여유를 부렸습니다. 하지만 하루라는 친구는 얼마나 성실하고 부지런한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80여 일이 지나버린 후였습니다. 더는 늦출 수 없었기에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어렴풋이 그리던 모임을 구체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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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를 빌리고 진행자를 섭외하고 서로 나눌 이야기를 정리하고… 그리고…

이 “그리고”라는 단어가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뒤에 어떤 단어를 더하지 않으면 뭔가 허전하게 느껴졌죠. 그래서 복기를 해보았습니다. 뭐가 빠진 것일까. 생각을 이어가던 중에도 밤 11시는 어김없이 찾아왔고 부랴부랴 하루의 인증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리고” 뒤에 담을 단어를 생각해봤습니다.


“복기”, “소통”, “마무리”… 모임의 큐시트에 이 단어들이 담길 곳은 정해졌습니다. 80여일 동안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느낀 점, 바뀐 일상, 기억에 남는 하루와 단어를 되돌아보고, 그것을 함께 나누고, 올해의 단어를 남기며 마침표를 찍는 프로그램. 여기까지만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죠. 하지만 저는 그다음도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제와 오늘의 단어를 담았으니 기왕이면 내일의 단어도 담아봤으면 싶었죠.


그래서 펜과 달력을 선물로 준비했습니다. 펜에는 각자 남긴 올해의 단어를 각인했고 내년 달력은 매일 단어를 남길 수 있도록 일력으로 준비했습니다. 펜과 달력. 그것이면 프로젝트 100 ‘오늘 하루, 단어’가 끝나도 내년의 단어를 담을 수 있을 것 같았죠. (하루의 단어를 너무나 담고 싶은데 주변에 펜과 달력이 없어 담지 못한다면 너무 안타까운 일이잖습니까?)


그렇게 큐시트의 ‘내일’이라는 칸에 담을 프로그램 준비도 끝나니 이제야 그럴싸해 보였습니다. 이대로만 진행된다면 재미가 조금 없더라도 의미는 충분하겠구나. 스스로 뿌듯해할 정도였죠.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양지 쌀국수 한 그릇에 ‘짜조’ 정도는 추가 주문해도 괜찮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큐시트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막히는 강변북로를 지나(심지어 길도 한 번 잘못 든) 모임이 열릴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모임 장소의 이름은 <진부 책방>이었습니다. 서점이자 대관도 함께하는 소담한 공간이었죠. 실제로 가본 것은 처음이라 어색할 만도 했지만, 세상의 모든 책방은 닮은 부분이 있어서인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진행을 맡은 아키의 의견대로 모임은 다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스타일로 확정을 했고 좌석 배치도 둥그렇게 모여 앉을 수 있도록 구성을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되자 한 분씩 단어로만 만났던 이들이 도착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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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들이 오시는 길을 상상해봤습니다. 누군가는 혼자, 누군가는 동행과 아마도 낯설었을 이 길을 따라 걸어왔을 것입니다. 그사이 그들은 어떤 단어를 떠올렸을까요? 지하철 일수도 있고 거리일 수도 있고 책방이나 모임, 혹은 만남 같은 것들이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하나 더 더하자면 “단어”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대체 단어에는 어떤 힘이 있는 걸까요? 어떤 능력을 지닌 친구이길래 “단어”를 위해 100일의 시간을 함께 약속하고 나른한 일요일 오후 시간을 양보하며, 이 낯선 공간까지 낯선 이들을 만나러 온 것일까요? 저는 그것이 몹시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단어를 조금 분해해볼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어는 일단 체급이 적당합니다. 말하자면 헤비급이라고 볼 수 있는 ‘책’이나 라이트헤비급 정도는 될 ‘문장’은 견디기에 너무 무겁죠. 하지만 단어는 다릅니다. 많이 봐줘야 라이트급, 혹은 슈퍼플라이급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제 헤비급과 슈퍼플라이급의 무게 차는 40kg이 넘게 나는군요) 이렇게 가볍게 지닐 수 있다는 것, 내 삶에 이거 하나 더한다 해도 부담이 없을 친구. 그것이 “단어”가 가진 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반면, 속도는 놀랍습니다. 가벼운 무게 때문인지 “단어”는 순식간에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하고 또 순식간에 다른 단어에 자리를 양보해줍니다. 조금 산만한 친구인가? 생각할 수도 있지만, 머리가 잔뜩 무거운 날에는 오후 볕에 비친 먼지 한 톨의 산만함을 무한정 따라다니고 싶을 때가 있지 않나요? 그러니 이런 속도감 또한 “단어”의 능력 중 하나일 것입니다.


이런 적당한 무게와 적당히 산만한 단어의 특성이 100일 전, 그리고 오늘. 우리를 이 자리에 모아준 것이라 해도 크게 무리는 아니리라 생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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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성격의 공기가 한자리에 모이자 적당한 어색함이 감돌았고 눈과 손가락은 가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곤 했습니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진행자의 목소리겠죠. 모임의 진행을 맡은 북 큐레이터 아키의 리드로 우리는 지난 100일에 담은 ‘단어’와 그 속에 담긴 이야기 혹은 감정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 단어를 확장 시켜줄 책을 추천받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마침표가 찍힌 모임의 끝은 내일의 단어를 담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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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준비한 다른 단어가 담긴 같은 펜, 그리고 같은 일력을 나눠 받은 우리는 처음으로 내일 담길 단어를 고민했습니다. 그렇게 모인 단어에는 “me” “전환” “시도” “이루다” “도전의 해” “파도” “놀이터” “꿈” “선물” “사랑”과 같은 단어가 모였습니다. 신기하게도 비슷한 성향의, 색상표로 보면 같은 계열의 색이라 말할 수 있을 단어들이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미리 짠 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것은 아마도 모임의 장소, 함께 둘러앉은 테이블로 뭉글게 오르던 온도가 대신 답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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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을 마치고 아키와 연남동 쌀국수집으로 향했습니다. 아키는 비빔 쌀국수를, 저는 불고기 쌀국수를 주문했습니다. 짜조는 주문하지 않았습니다. 꽤 배가 불렀으니까요.




PS.

모임에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과 그곳에 모인 단어에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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