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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호랑이, 그리고 장욱진들

#양주, 장욱진

by 최동민


잠들기 10분 전, 침대맡에서 떠나는 게으른 여행 이야기.

<자정 무렵 여행하기> 최픽션 입니다.


일의 특성상 자정 넘어 작업을 하는 날이 많습니다. 그럴 때면 하루 내 북적이던 집은 적막에 싸이고 냉장고 문 여는 소리도 크게 들려 놀라곤 합니다. 조심스레 마실 것을 하나 꺼낸 후, 다시 의자에 앉으면 또다시 적막. 들리는 것은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뿐입니다.


이런 시간은 외로움을 품고 있을 때가 많아 조금만 방심을 하면 고개를 젖히고 나직이 한숨을 내쉬게 됩니다. 하지만 아주 가까운 곳에서 아이의 잠자는 소리가 들려오면 외로움은 저만치. 고요도 살짝 자리를 내주어 불도 켜지 않은 방이 환해지곤 하죠.


이것은 가족이 주는 특별한 힘이라고 봐도 무방할 텐데요. 일본의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가족은 아무도 보지 않는다면 내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말했지만, 그 역시 이런 특별한 힘을 몰랐다면 이 같은 농담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이런 쓸모없는 개인사 이야기를 꺼내서 죄송하네요. 하지만 오늘 함께 여행할 장소. 그리고 그곳에 머문 사람을 생각하면 가족에 관해 아주 짧은 이야기라도 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럼 이제 정말 여행을 떠나볼까요?



오늘 함께 여행할 곳은 경기도 양주입니다. 이곳에는 무리하지 않고 뻗은 계곡과 눈에 담을 수 있을 정도의 산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한 마리 새하얀 호랑이가 있는데요. 그 호랑이의 이름은 <양주시립 장욱진 미술관>입니다. 이 미술관은 하늘에서 바라보면 정말이지 한 마리 호랑이가 자연의 캔버스에 그려진 것처럼 자리 잡고 있는데요. 이 미술관을 설계한 최성희-로랑 페레이라는 장욱진 화가의 그림 <호작도>에서 영감을 받아 미술관 설계를 했다고 합니다. 이런 의미와 미적인 감각, 그리고 양주의 자연과 너무나 잘 어우러진 이 미술관은 ‘김수근 건축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영국 BBC에서 2014년에 선정한 ‘2014년 위대한 8대 신설 미술관’에 꼽히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 미술관이 의미가 있는 것은 장욱진이라는 화가의 삶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자리에 있기 때문인데요. 돈과 명예보다는 간소한 삶을 지향했고, 자연의 곁에서 가족과 함께 복작이는 삶을 사랑했던 그라면 이곳을 분명 마음에 들어 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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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욱진 화가는 이중섭 화백과 마찬가지로 가족을 아끼고 사랑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그 사랑의 시작은 그의 부모님 때부터 이어졌죠. 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난 장욱진 화가는 자상한 부모님과 함께 부족함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 아이들에게도 그림 그리기를 권했다고 하는데요. 형제들 중 장욱진 화가가 가장 그림 그리는 것을 즐겼다고 하죠. 하지만 문제는 사랑하는 아버지가 장욱진 화가가 다 크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버린 것입니다. 장욱진 화가는 그런 아버지의 부재를 슬퍼하며 이때부터 그의 트레이드 마크라 볼 수 있는 그림 소재. ‘까치’를 그렸죠. 한국에서 까치는 이승과 저승 사이를 오고 가는 새로 여겨졌습니다. 전래동화만 봐도 쉽게 알 수 있죠. 그래서였을까요? 장욱진 화가는 까치를 그리며 저승의 세계로 넘어간 아버지와 연락을 하고 싶은 마음에서인지 수없이 까치를 그리곤 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장욱진 화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가 결정되는데요. 그건 바로 ‘가족, 집, 그림’이었습니다.

(장욱진을 화백이 아닌 화가라 부르는 이유도 그가 화가의 ‘가’에 집이라는 뜻이 들어 더 좋다 생각했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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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가서도 장욱진 화가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나중에 한국 추상의 거장이 되셨을 만큼, 이 시절에도 관습적인 그림, 사실 그대로의 그림을 그리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하죠. 그래서 일본인 선생님들은 장욱진 화가의 그림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행히 일본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새로운 미술 선생님이 왔고, 그는 장욱진 그림의 특별함을 눈여겨 보아주었습니다. 그 덕에 장욱진 화가는 ‘전국 소학생 미전’에 출전할 수도 있었죠. (처음 참가한 이 대회에서 일등상을 받았다고 하니… 재능이 대단했다는 걸 알 수 있죠.)


이렇게 그림 실력을 쌓아가던 중, 장욱진 화가 역시 전쟁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전쟁은 장욱진에게 그토록 중요했던 가족과 집을 잃게 만들었는데요. 피난 길에 살고 있던 집은 버려야 했고, 가족과도 길진 않지만 이별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이런 아픔을 겪으면서도 장욱진 화가는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되려 그 참담한 현실을 더 동화적으로, 그래서 더 비현실적으로 그려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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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작품 생활을 이어가며 장욱진 화가는 다시 가족을 만나고, 교수 생활을 하기도 하고, 김환기, 이중섭, 유영국 같은 당대의 거장들과 함께 ‘신사실파’를 결성해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된 장욱진 화가. 하지만 그에게는 숨겨놓은 꿈이 있었는데요. 그건 바로 번잡한 도심을 떠나 한적한 자연의 곁에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서울대학교 교수 자리도 내던진 채, 남양주 덕소 지역의 강가에 집을 짓고 작품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장욱진 화가의 꿈이 모두 이루어진 것이었죠. 물론 교수 수입이 없어지는 바람에 살림살이는 아내의 몫이 되었지만 말이죠.


“나는 고요와 고독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 자기를 한곳에 몰아세워 감각을 다스려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아무것도 욕망과 불신과 배타적 감정 등을 대수롭지 않게 하며, 괴로움의 눈물을 달콤하게 해주는 마력을 간직한 것이다. 회색빛 저녁이 강가에 번진다. 뒷산 나무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강바람이 나의 전신을 시원하게 씻어 준다. 석양의 정적이 저 멀리 산기슭을 타고 내려와 수면을 쓰다듬기 시작한다. 저 멀리 노을이 머지않아 달이 뜰 것이다. 나는 이런 시간의 쓸쓸함을 적막한 자연과 누릴 수 있게 마련해 준 미지의 배려에 감사한다. 내일은 마음을 모아 그림을 그려야겠다.”

<강가의 아틀리에> 장욱진


장욱진 미술관을 천천히 둘러보고 나온 거의 대부분 사람들은 다른 어떤 작품보다 장욱진 화가가 그린 집과 가족의 모습이 담긴 그림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것이 부엌의 몇몇 소도구를 그려놓은 소품이라 하더라도 말이죠. 그 이유는 역시는 그런 집과 가족이야말로 장욱진 화가가 평생 그리고자 했던 가장 소중한 소재였기 때문일 텐데요. 함께 이곳의 그림을 조금 더 감상한 뒤, 밖으로 나와보죠.


장욱진 미술관의 출구로 나서면 몇몇 놀이기구 or 놀이 작품이 있는 공간과 함께 재밌는 작품이 줄지어 선 조각 공원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마치 장욱진 화가가 어린 자식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것 같은 공간인데요. 아이가 있다면 하얀 호랑이가 누워있는 조각 들판에서 즐겁게 뛰어다니시는 것도 좋을 거예요.


그렇게 놀았음에도 아쉬운 마음이 드신다면 그럴 때는 몸을 돌려 장흥 계곡으로 움직여 보죠.


간단한 캠핑이 가능한 넓은 터가 있는 장흥 계곡. 이곳은 물살이 그다지 거칠지 않고, 깊이도 한이 없지 않은 곳이기에 이곳 역시 아이들과 함께,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좋습니다. 장욱진 화가의 강가의 아틀리에. 그곳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에요.



오늘은 이렇게 양주에 위치한 장욱진 미술관으로 자정의 여행을 떠나봤습니다.


워낙 미술관 자체가 아름답고, 미술관을 둘러싼 자연이 유쾌한 곳이어서 미술관보다는 주위를 둘러보는데 더 시간을 쏟은 것 같은데요. 다음 시간에는 미술관 안에서 장욱진 화가의 작품을 둘러보는 여행을 떠나보도록 하죠.



그럼 다음 여행의 시간까지.

잘 지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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