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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문의 에세이】 ❝미문의 생❞

⟪소설가의 일⟫ 김연수

by 최동민

"미문을 쓰고 싶다면 먼저 미문의 인생을 살자"


⟪소설가의 일⟫

글 | 김연수

펴낸곳 | 문학동네




i가 출발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무로 된 D의 책상 위에는 한 권의 책이 있었다. 그 책은 꽤 여러번 읽어 온갖 장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D는 때때로 이상한 상상을 한다. 예를들면 갑작스레 법이 바뀌어서 책 한 권 당 한 줄의 문장에만 밑줄을 그을 수 있게 된 것 같은.

만약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떨까? 나는 내 눈 앞에 이 책에서 어떤 밑줄을 지우고, 또 어떤 포스트잇을 떼어내야 할까. 여간 곤혹스런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일은 몹시도 쉽게 풀릴지도 모른다. 소거법으로 하나를 남기는 것이 아닌, 우선 순위를 정해보는 것이다. 포기해야 할 것들에 시선을 두는 것이 아닌, 함께할 것에 시선을 두는 방식. 이 방식이라면 일은 조금 쉬워질 것이다.


여러 좋은 것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는 일. 그것은 고민이나 걱정에 가깝다기 보다는 흥분과 행복에 가까운 일이다. 왜 아니겠는가.

실은 i가 오기 전, D와 J는 아주 비슷한 경험을 했다. 두 사람은 좋아하는 많은 것들 사이에서 '함께하는 생'. 그것을 선택했다. 그것은 무언가를 포기하고 얻은 결과가 아닌, 무언가를 선택한 결과였다. 그래서 두 사람은 몹시도 분주히, 즐거워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i의 별에. 그 멀고 먼 별에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들린 것은. 술잔을 부딪히는 소리와 그 소리에 i의 호기심이 동한 것은.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 소리를 붉은 실 삼아 i는 D와 J에게 출발했다는 두 줄의 소식을 전했다.


그 소식을 들을 즈음. 나무로 된 D의 책상 위에는 한 권의 책이 있었다. 그 책은 꽤 여러번 읽어 온갖 장에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D는 망설임없이 한 페이지를 펼친다. 그곳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미문을 쓰고 싶다면 먼저 미문의 인생을 살자"


그 문장은 언젠가 D가 그곳에 밑줄을 긋던 그때부터 D의 좌우명 비슷한 것이었다. 게다가 i가 출발했다는 소식을 전해듣자 D는 조급해졌다.

'아직 미문이라 불리는 인생을 살고 있지는 못한 것 같은데...'

그런 걱정에 당황하고 있을 때, 현명한 J가 말한다.

"미문의 인생을 살지 못했다면, 미문부터 모아보자. "


언제나 그렇듯 좋은 생각이었다. 미문을 모으다보면 알게 될 것이다. 미문의 인생이 무엇인지. 그리고 살 수 있을 것이다. 미문의 생이라는 것을. 또 운이 좋다면 그렇게 차곡차곡 모은 미문을 i에게 선물해줄 수도 있으리라.


그래서 담아보기로 한다.

우리의 i.

너에게 줄 미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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