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문의 에세이】❝우리는 2만원 짜리 스탠드를 켰다❞

by 최동민


❝ 어둠을 그리려면 빛을 그려야 합니다. 빛을 그리려면 어둠을 그려야 하죠. 어둠과 빛, 빛과 어둠이 그림 속에서 반복됩니다. 빛 안에서 빛을 그리면 아무것도 없지요. 어둠 속에서 어둠을 그려도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꼭 인생 같지요. 슬플 때가 있어야 즐거울 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좋은 때가 오길 기다리고 있어요. ❞



⟪밥 로스의 말⟫

미문 | 밥 로스




1.

"네 시작은 미천했지만, 끝은 창대하리라."

D는 이 말을 생애주기에 따라 다른 이유로 싫어했다. 일단 아주 어린 시절. 그때는 자신의 시작이 미천하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주변의 아이들보다 조금은 앞서 있다고 믿었고 어떻게든 그렇게 하려 발을 굴렀다. (아마도 이 시기가 D가 승리욕이 있던 유일한 시기였을 것이다) 그렇게 성장을 하다 보니 D는 깨달았다. 생각보다 훨씬 더. 자신의 시작은 미천하다는 사실을.

중학생 때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던 때. D는 그 미천한 시작에 조금 짜증이 났다. 하지만 고등학생의 D가 중학생 D를 만났더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넌 아직 미천함이 뭔지 몰라."

D는 그 말을 듣지 못한 채, 고등학생이 되었다. 이번에는 수학여행에 갈 수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의 굴욕을 감당한 결과, 가능한 일이었다. 중요한 건 그다음이었다. D의 부모는 말했다. 수학여행 기간에 이사하게 되었으니, 다녀오면 다른 주소로 와야 한다고. D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 말을 믿었다. 그리고 수학여행을 떠났다.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지만, 그해 여름은 무더웠다. 역사적인 폭염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런데도 D의 수학여행 일정에는 포항제철 견학 등이 있었다. 놀랍게도 더운 그곳과, 몇몇 재미없는 유적지. 처음 떠난 수학여행은 생각보다 시시하고 덥다는 사실을 D는 깨달았다. 어서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돌아오는 버스에 올랐다. 주변의 반 친구들은 여전히 시끄러웠고, D는 홀로 잠을 청했다.

그리고 일어났다.


미천함이란 무엇인가. 수학여행에서 돌아온 D에게 누군가 이런 질문을 했다면 D는 말했을 것이다. 미천함이란 한여름 햇볕 아래, 지붕 없이 서 있는 것이라고. D가 그랬다. 학교로 돌아온 D는 갈 곳이 없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 D의 집에는 예정대로 다른 사람들이 들어왔다. D의 방에도 다른 이의 살림이 채워졌다. 그렇다면 D의 책상은? 책장은? 옷장은 어디에 있을까? 정답! 어디에도 없었다.

IMF는 당시 우리가 체감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국제기구였다. 미천한 가정을 성실하게 방문하던 국제기구. 그 성실함이 지독히 잔인했던 국제기구. D의 집도 D가 여행을 떠난 사이, 그들의 방문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가정을 떠나야 했을 것이다.


돌아온 D가 갈 곳은 앞자리가 2도 되지 않는 작은 평수의 외할머니 집이었다. 당시 외할머니집에는 인구밀도가 상당히 높았다. 시골서 살던 외할아버지도 올라와 있었으며, 아마 외삼촌도 있었던 기억이다. 거기에 D의 식구들까지. 발 디딜 틈 없다는 말을 실감할 정도였다. D는 도보로 통학이 가능하던 거리에서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거리의 집에 머물게 된 사실이 어이없게 느껴졌다. 더 큰 어이없음은 그 시간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른다는 점에 있었다. 잘하면 내일이라도 지붕을 구할 수 있었지만, 잘하지 못한다면 졸업할 때까지도 달라지지 않을 수 있었다. 그 미천함이 말이다.

다행이고 또 불행인 점은 그런 미천함의 역사가 이상한 꺾은선 그래프처럼 그려졌다는 점이다. 더 곤두박질칠 때도 있었지만, 가파르게 상승할 때도 있었다. 그래봤자 더 미천한지, 덜 미천한지의 차이였지만 그래도 그런 변화가 D를, D의 가족을 살게 했다. 그때의 상승 곡선은 뭐랄까... '창대'라는 말을 기대하게 했으니까.



2.

"네 시작은 미천했지만, 끝은 창대하리라."

그렇다면 그 끝은 어디일까? 대체 언제쯤 미천함의 끝에 도달하고, 대체 언제쯤 창대해질 수 있을까. 그 시간이 시골 버스의 배차 간격만큼이나 늦어 기다리다 지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D는 그 말이 싫어졌다. 결혼을 준비하던 그때까지도 따라다니던 그것이 지긋했다.


어디든 다르지 않겠지만 한국에서 결혼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집이다. 그것도 양가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상황의 신혼부부에게 그 임무는 헤라클레스의 과업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 난도가 높다. D와 J에게도 그랬다. 고려해야 할 것은 너무나 많았고, 가진 것은 부족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헨젤과 그레텔이 된 것처럼 숲을 헤매며 과자의 집을 찾아 나섰다. 물론 그런 집은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무것도 없는 집에 과자를 붙이기로 두 사람은 결심했다.


어린 시절 D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EBS에서는 밥 로스 아저씨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어두운 세트에 이젤과 캔버스. 그 앞에서 팔레트를 들고 그림을 그리는 아프로헤어의 밥 아저씨. 그의 그림은 마술 같았다. 시작할 때는 분명 아무것도 없는 캔버스였고, 완성 직전까지 아무것도 아닌 선과 칠에 불과했는데, 방송이 끝날 때쯤이면 그곳엔 알프스의 산맥이, 거친 계곡이, 가을의 낙엽길과 소담한 작은 집이 있었다. 그야말로 시작은 미천했지만, 끝은 창대한... 그 말에 꼭 맞는 결론이었다. 대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 D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밥 로스 아저씨가 하는 말을 천천히 담을 뿐이었다.


❝ 어둠을 그리려면 빛을 그려야 합니다. 빛을 그리려면 어둠을 그려야 하죠. 어둠과 빛, 빛과 어둠이 그림 속에서 반복됩니다. 빛 안에서 빛을 그리면 아무것도 없지요. 어둠 속에서 어둠을 그려도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꼭 인생 같지요. 슬플 때가 있어야 즐거울 때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 좋은 때가 오길 기다리고 있어요. ❞


밥 로스 아저씨의 말은 그야말로 별것 아닌 진실이었다. 과학적으로 보면 초등학생도 대답할 수 있는 그런 진실. 어둠을 그리려면 빛을 그려야 하고, 빛을 그리려면 어둠을 그려야 한다는... 이건 꼭 배워야만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태어나면서부터 알게 되는 몇 가지 지식 중 하나였다.

그리고 자라면서 쉽게 잊고 마는 지식 중 하나였다.



3.

D와 J는 어렵게 구한 집의 벽을 칠했다. 페인트의 색은 방마다 다르게. 낡은 철문에는 짙은 초록을 칠했다. 밋밋한 벽에는 부족한 수납을 채울 선반을 못질했고, 가구는 모두 직접 조립해 사용하는 가구로 채웠다. 책상은 길게 두 개. 나란히 작업을 할 수 있게 했고, 언젠가 함께할 고양이를 위한, 그전에는 식물이 놓일 자리를 위한 공간도 책장 위에 만들었다. 오래된 화장실의 낡은 변기와 세면대를 직접 철거한 뒤, 설치하고, 벽에는 타일을 붙였다. 그리고 서툰 솜씨가 눈에 띄지 않게 스탠드와 간접조명으로 집을 채웠다. 그러니 놀랍게도, 적당한 어둠이 두 사람의 서툶을 가려주었다. 마카롱만큼 달콤함은 아니지만, 에이스 정도의 맛은 보장해 주는 두 사람의 과자의 집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아, 한 가지 더. 두 사람의 조리 공간이자 식탁이 될(이제 막 독립한 신혼부부들처럼 이런 작은 집에서는 모두가 한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낼 줄 알아야 했다.) 아일랜드 식탁. 그것을 배송받아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식탁이 생각보다 무거웠다는 것이고, 집은 엘리베이터 없는 5층이었다. 배송 기사 아저씨는 도와줄 필요 없다며 거뜬히 식탁을 들고 정확한 자리에 식탁을 놓아주었다. 그 힘과 기술에 감탄했고, 또 고마웠다. 누군가 우리의 시작에 이렇게 힘을 더해준다는 사실에 조금은 눈물이 날 뻔도 했다. 하지만 그런 마음조차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는 두 사람은 아직 미천한 신혼부부였다. 그런 D와 J를 보며 아저씨는 말했다.


"다들 되는대로 살지, 이렇게 더 좋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도 별로 없어요. 잘하고 있는 거예요."


두 사람은 직감했다. 그 말은 죽을 때까지.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발버둥 치는 것조차 하찮게 느껴질 때. 그런데도 발버둥 쳐야 했던 두 사람에게 그 말은 넘칠 정도의 위로이자 인정이었다. 두 사람에게는 그 인정이 필요했다. 아무것도 없는 캔버스에, 서툴러도 힘껏 붓질하는 것. 그렇게 해서 미천한 시작의 지점에 머무는 게 아닌, '창대'라는 방향점으로 내달리는 것. 그렇게 달리다 보면 언젠가는 밥 로스 아저씨의 캔버스 속 예쁜 그림처럼. 근사한 완성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인정. 그것이 필요했다.


어느덧 어둑해진 밤. 두 사람은 2만 원짜리 스탠드 조명을 켰다. 방은 충분할 만치 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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