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굴튀김 같은 것 #2. 벽이 아니었어?

by 최동민
tempImaget6Rk7A.heic


1.

'한계 짓기'를 좋아합니다. 그것에는 꽤나 큰 장점이 있죠. 절망하지 않게 된다는 장점 말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일까요?

"달리기? 하프(21km) 정도는 죽도록 노력하면 가능하지 않겠어?"라고 누가 묻는다면 한참 고민하는 척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말이지…. 아무래도 하프는 무리일 것 같아. 내가 어릴 때 농구를 많이 해서 그런지 연골이 아예 닳아버렸거든.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러니 10km. 좋아! 10km 완주 정도로 목표를 잡아 보자고."

이런 식이라면 실패 확률이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아무리 미천한 몸뚱아리라 하더라도 10km 정도는 뛸 수 있을 테니 한계를 지음과 동시에 성공이 눈앞에 보이는 것입니다. 만약, 이때 주제 모르고 분에 넘치는 목표를 설정했다가는 (언젠가는 이룰 수도 있겠지만) 꽤 오랜 시간 실패의 좌절감을 맛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한계 짓기'의 방법을 자주 사용하곤 합니다. 문제는 이 방법에 결정적 단점이 있다는 것인데요. 그건 바로 언젠가 21km를 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10km 완주자로만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하지만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꾸자."

체 게바라의 평전을 읽다가 무슨 급한 일이 있었는지 그의 명언 앞부분만 기억하면 이런 사태가 벌어집니다. '리얼리스트'라든지 '객관적'이라든지 하는 말에 취해 자신의 수준을 지나치게 낮게 보는 것. 그건 얼핏 냉철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체 게바라가 '리얼리스트'이기만 했다면 어땠을까요? 그의 평전이 그렇게 두꺼워질 필요가 있었을까요? 평전의 표지 역시, 그렇게 원색적으로 빨갈 필요가 있었을까요? 아마 아닐 것입니다. 그의 평전이 지금껏 읽히는 것, 그것은 명언의 앞부분이 아닌, 뒷부분 때문입니다.

"하지만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꾸자."

살다 보면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저런 꿈을 꿀라치면 주변에서 도시락 든 이들이 갑자기 달려와 뜯어말릴 태세를 취하니까 말이죠. 게다가 '몽상가' 같은 단어는 얼큰히 취한 술자리에서도 간지럽다는 취급을 받을 정도니…. 불가능한 꿈을 꾸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어쩌면 오늘 하루도 그랬을 것입니다. 불가능한 꿈을 꾸고 싶었지만, 일단은 리얼리스트가 되는 하루. 그런 하루를 보냈을 것입니다. 하루뿐이 아니죠. 한 주, 한 달, 일 년…. 꽤 긴 시간. 스스로에 한계를 지으며 살아왔습니다. 서글프지만 그것이 진실입니다.


2.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는 여러모로 흥미로운 작품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사랑해 마지않는 '횡 스크롤 어드벤처 게임'과 비슷하고(<슈퍼 마리오 브라더스> 게임을 떠올리시면 될 듯합니다.) 칸마다 각기 다른 서사와 그에 맞는 미술, 시각 장치 등이 펼쳐져 눈이 돌아가는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명장면도 많았습니다. 틸다 스윈튼의 구두 씬이라든지, 바퀴벌레 양갱 씬, 그리고 칸을 넘어갈 때마다 벌인 사투의 액션까지. 이야기 나눌만한 장면들이 정말 많습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남궁민수(송강호 역)의 한 마디 대사였습니다.


"저게 너무 오래 안 열려서 모두들 벽이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은 문이야."


극 중에서 열차의 보안 설계자로 등장하는 남궁민수는 굳게 닫힌 문, 그래서 벽처럼 보이는 어떤 곳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합니다. 저건 벽이 아니라 문이라고.

그 대사에 <체 게바라 평전>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의 기분을 느꼈다면 지나친 것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 느낌을 받았습니다. 남궁민수가 가리킨 곳은 '한계'였습니다. 모두가 한계라든지 막다른 길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스스로 열기를 포기했던 곳. 그리하여 '문'이라는 이름에서 '벽'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곳.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곳까지 온 열차의 수많은 사람들은 '벽'이라 쓰여있다 믿으며 눈에 훤히 보이는 손잡이를 잡지 않습니다. 그저 지나치거나 돌아갈 뿐이죠. 마치 '한계 짓기' 방식을 사용하듯이 말입니다.

그 결과는 어땠나요? 벽이 된 문은 더욱더 단단한 벽이 되고, 벽 안의 사람들은 그곳까지 온 자신들에 축하와 위로, 혹은 절망의 선물을 안겨준 채, 그곳에서 멈춰 섰습니다. 그저 손잡이만 돌리면 되는 일이며,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닌데도 말이죠.


박찬욱 감독은 <설국열차>가 상을 받는 시상식에서 제작자로 시상대에 올라, 자신은 이 장면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지켜보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들도 벽인 줄 알았던 여러분의 문을 꼭 찾으시길 바랍니다."

그 말을 듣자 자연스레 "거 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참…. 내 곁을 둘러싼 벽이 된 문을 들킨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그것은 부끄러움의 감정과 가장 가깝지만, 한편으로는 해방의 감각과도 비슷했습니다. 이런 것이죠. "…. 결국 들켜버리고 말았네요? 별수 없죠. 열어버리는 수밖에 말입니다."


그래서 열어볼까 싶어졌습니다. 최악이라고 해봐야 다시 닫는 데 힘과 시간이 들 뿐일 테니까요.




작가의 이전글휘발성 에세이 #103. 우연히, 웨스 앤더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