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때 거둘 거도 아니면서 무슨 씨앗에 그리 욕심을 내?
또 다른 내가 늘 눈을 치켜뜨며 잔소리를 하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마트에 가면 먼저 씨앗 코너로 가서 들었다 놨다는 반복하고 중급코스의 씨앗들을 구입하는 것도 망설이지 않을 때가 많다.
아무튼 몇 년째 밭에는 전에 뿌려 놓았던 씨앗들의 씨앗들이 자라나 또 열매를 맺고 다시 떨어져 또 나기를 계속 되풀이하는 것들이 몇 있기는 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방풍'이다.
겨울날 강한 추위와 한 여름 폭염에도 거뜬하게 살아남은 약초이자 나물이다.
봄에 새순이 올라오면 데쳐서 무쳐 먹거나 장아찌를 담그면 좋다.
하지만 정작 데쳐 먹거나 장아찌를 담가 먹은 적이 없다.
저것들 그냥 싹 베 없애버리지. 뭐 하러 내버려두어.
풀보다는 낫잖아. 꽃도 피는데.
구박 아닌 구박덩이가 되지만 언젠가는 데쳐 먹거자 장아찌를 담가 먹을 것이다.
나름대로 밭에서 터줏대감이 되어가는 방풍은 나와 함께 늙어가고 있다.
그다음이 달래와 머위 나물, 쌈당귀이다.
달래는 어머니의 최애 식물이다. 원래는 밭에는 별로 없었는데 집 근처 여기저기서 채취한 달래 씨를 밭에다 그냥 툭, 던져두었더니 매년 그렇게 번질 수가 없다.
머위도 집 근처 산 아래에서 난 자연산을 캐다가 옮겨 놓았는데 몇 해는 잘 자라더니, 요즘은 그냥 띄엄띄엄 나는 것이 영 시원찮다.
쌈당귀는 마트에서 곰취와 함께 모종을 구입해서 심었는데 곰취는 정말 사라져 버렸고 쌈당귀만 겨우 몇 포기 살아남더니, 꽃이 피고 다음 해 봄에는 계속 그 자리에서 자라나고 있다.
신기하기도 하고 정작 뜯어서 쌈을 싸 먹어 본 적은 없다.
왠지 몇 포기 안 되는 것을 뜯는다는 것이 좀 안 됐다 싶기도 하고 해서.
그 외 산더덕을 과감하게 옮겨 와서 심었는데 무엇이든지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으니까 풀에 덮이고, 그리고 모르고 제초제를 뿌리는 바람에 다 죽어 버렸다.
산에서 자라는 것은 그냥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온전한 것이다.
정 먹고 싶으면 사 먹자.
못 써, 못 쓴다고.
처음에는 왜 이렇게 늙었을까. 제때 거둬들이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럽기도 하고, 오이 먹겠다고 싶어 놓았더니 매일 같이 먹을 것도 아닌데 하는 동생이 얄밉기도 했다.
처음엔 택배로 서울 언니네도 보내고 친한 지인한테도 싱싱한 것 골라 따서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말처럼 쉽지가 않았다. 다른 농사가 더 급했고( 흔히 돈 되는 농사) 오이쯤이야, 가지쯤이야 버려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은 농사를 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한심스러운 행동이었다.
해먹을 반찬이 마땅치 않아 노각 하나를 별생각 없이 따다가 한 번 무쳐서 어머니랑 맛을 보았다.
어라? 괜찮은데.
여름날 먹기 좋은 아삭함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생각보다 오이의 향긋한 냄새도 남아 있었다.
마트에 진열된 노각이 몇천 원 한다는데 굳이 사 먹을 필요가 없다.
몇 번을 그렇게 노각 사랑에 빠져 여름 내내 해 먹었었다.
그리고 그곳에다 김장 배추와 무를 심어야 할 것 같아서 밭 정리를 하게 되었는데, 노각이 서너 개 달려 있길래 따다가 냉장 보관을 해두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또다시 잊어버리는 바람에 며칠 전 열어 본 냉장실에는 곰팡이가 수두룩하게 핀 노각이 처연스럽게 있는 걸 보았다.
사물이 늙어가는 것은 시간이 지나 오래되어서 나름대로의 쓰임새를 다하는 것이고, 생물이 늙어가는 것은 그냥 부패되고 썩어버리는 것이라고 본다.
밭에서 한 해를 보내거나 한 계절을 맞는 농작물들은 그렇게 늙어가는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맞이하는 또 다른 시작은, 곧 그들이 다시 씨앗으로 부활하는 순간일 수도 있겠다.
종자 봉투에는 한 알의 씨앗도 소중히라고 적혀 있다.
한 톨, 한 알의 씨는 품절되는 마트의 생산품이 아니고 어쩌면 인간이 지키지 못했을 멸종된 식물들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