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유불급, 과함은 모자람만 못하다. 너무 잘하려고 애쓰다 넘치는 바람에 막 깨어난 어린 모종들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한동안 농협에서 고추모종을 사다가 심었었는데 원하는 종자로 이루어진 상품이 없길래, 직접 농약사에 가서 추천을 받거나 선택해서 구입한다.
(아직도 대부분의 소농가에서는 직접 집에서 이식을 한다)
그리고 요즘은 이상 기온으로 작물이 갑작스럽게 병충해에 노출이 되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의 신품종은 바이러스에 강한 편이긴 하다.
그래서 그런지 씨앗 한 봉지가 대략 10~15만 원의 가격대다.
대부분 칼라병이라고 하는 토마토반점 바이러스에 강한 종자로 개발되다 보니 더더욱 가격대가 만만찮다.
몇 년 전 농업기술센터에서 매년 하는 고추 재배 교육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공판장에 내다 팔 경우는 크기가 실하고 빛깔이 좋은 놈으로 가져가야 가격을 잘 받을 수 있다면서, 비싸도 좋은 씨앗을 구매할 것을 권했다.
그리고 소매로 파는 고춧가루일 경우에는 신품종보다는 재래종으로 판매되는 5~6만 원대를 구입하라고 했다.
그런데 어디 그게 마음대로 되는가.
이왕이면 비싸도 병충해에 강한 씨앗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처음부터 실해야 자라는 내내 농부의 마음은 편하다.
그리고 까딱 잘 못 되었다가는 한 두 포기가 아니라 밭 전체를 들어내야 할 판이, 그것이 농사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처음이 중요하다.
집에서 고추 모종을 낼 경우 시작은 매우 바쁘다.
대부분 2월 중순부터 하우스 내부에 설치된 열선 위에 싹을 틔운 모종판을 얹어놔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비닐로 한 겹 씌운 뒤 두꺼운 보온덮개를 덮는다.
30도 내외의 온도로 계속 유지해 주며 싹을 틔울 때까지 잘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농협 육묘 상에서 사는 값이나 별다르게 차이는 나지 않는다.
다만 이식이 빠르니까 한 두 물 따는 데 비하면 빠른 편이라, 좀 더 부지런하다면 이 방법을 택한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예외가 있듯이 열선 아래 흙이 너무 메마른 것 같아 유박을 뿌려 둔 해가 있었다.
그러면 좀 더 튼실한 모종이 되지 않을까 했는데, 며칠 뒤 3000 포기 가까이 심었던 것들이 시름시름 앓더니, 다 꼬꾸라져 버렸다. 유박의 독성을 무시했던 것이다.
모든 것들은 제때 자라고 제때 섭취해야 할 양이 있거늘, 무지막지하게 밀어 넣었던 결과다.
유박
유박(油粕)은 식물에서 기름을 짜고 남은 찌꺼기를 말하는데, 우리말로는 '깻묵' 정도에 해당한다. 이 찌꺼기에 질소, 인산, 칼륨 등의 성분이 많이 들어있다고 해서 유박비료라는 이름으로 농작물은 물론 화단, 잔디관리 등에 널리 쓰이고 있다.
간혹 뉴스에 공원에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다가 강아지가 우연찮게 유박을 먹었을 때 죽거나 탈이 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만큼 유박은 동, 식물에게는 치명적이다.
작물을 키울 때는 밀폐된 하우스 같은 경우 유박에서 발생하는 가스를 제거(대부분 공기 중에서 사라진다)하고 심어야 한다.
엄마는 예전에 조부모와 농사를 지었을 때 소거름을 밭에다 뿌린 적이 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가공 처리 된 유박이라는 것이 그렇게 상용화되지 않았을 때니까 주로 소거름이나 계분(닭)을 거름으로 많이 활용했다.
그때도 비닐하우스를 여러 동 하고 있었는데 소거름을 뿌리고 가스가 배출되는 시간도 없이 그냥 문을 닫았다고 했다.
그 다음날 밭에 가서 문을 열어 보니 하우스 동마다 고추가 다 바닥에 고개를 박고 있었다고 했다.
식물은 한 번 위기를 겪고 나면 대부분 살아나지 않거나 회생한다 해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해독제를 방제했지만 그만큼의 손해는 또 감당해야만 했다.
나의 첫 유박 피해는 올해도 지속되었다.
작년에 모종을 낸 하우스에 그대로 다시 했더니 아주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뒤늦게 영양제와 벌레 약을 방제했지만 뭔가 모르게 고추 잎들은 연초록에 가까운 채로 버티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독이 오르진 않았다.
어쩌면 유박의 잔재가 아직도 땅속에서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
밖이라면 눈비에 녹아서 이미 흙의 성분에 흡수되었겠지만 하우스 안이니 그냥 그대로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좀 이른 감이 없진 않지만 고추 모종은 그런대로 잘 자라 주었다.
여담이지만 오래전 다른 마을에 어떤 부부가 있었는데 유박가스 때문에 작물이 다 고사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서로 책임 전가를 하다가 싸움으로 번졌고 한 분이 그만 농약을 이용해서 목숨을 저버린 사건이 있었다고. 처음부터 누가 그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겠는가.
봄이 되면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누구나 내 밭에 내 논에 처음 시작을 잘하고 싶어 한다.
잘 가꿔서 잘 수확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잘 된다면 농부의 한숨도 없을 것이고, 농협 대출 창구에 뻔질나게 드나들지는 않을 것이다.
아직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도박처럼 운에도 걸어야 하고 내 실력에도 걸어야 하는 엄청난 판인 것이다.
6동이나 되는 밭의 비닐하우스 내부에 유박을 실어다 뿌리는 일은 만만치 않다.
전에는 그냥 입구에서 들어다가 저 끝까지 낑낑대며 날랐지만 그것도 한 해뿐이다. 20Kg이나 되는 무게는 한 두 개는 괜찮아도 한 동에 40~50개는 무리였다.
차량은 들어갈 수 없는 높이라 집에 있는 경운기에다 실어서 저속으로 운행하며 위에서 떨어뜨리는 방법을 사용해 왔다.
작년에는 보다 못해 셋째 삼촌이 유박과 비료 뿌리는 기계를 가져오셔서 도와주셨는데 그것도 생각보다 힘든 작업이었다.
뿌리는 기계는 사방팔방 뿌리기는 하지만 하우스 가쪽에 가서 쌓였고 들어 올려 주는 일도 힘들기는 매한가지였다.
차라리 지금껏 해왔던 방식이 오히려 나을 것 같아서 올해는 그냥 해오던 대로 했다.
뭐든지 생각을 하고 방법을 찾는다면 몸은 좀 더 힘들 것이다.
농사일도 머리를 쓰면 손발이 덜 고생한다고 누가 그랬던가. 하지만 그냥 어른들이 해오던 대로 시작했으니 당분간은 그렇게 할 것이다.
골병든다 라는 말이 듣기는 좋지 않지만 골병들만큼의 농사를 짓지도 않았고 또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다.
딱, 할 만큼의 일을 벌여 놓을 것이고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내 체력을 소비하고 싶다.
그런데 과연 뜻대로 될 것인가.
전문적인 유박을 뿌리는 기계도 한쪽으로 치우치게 알맹이가 날아가 버리고 곧잘 돌아가던 기계도 삐그덕거리며 고장이 나기도 하는데, 비전문적인 초보 농사꾼이 내 방식대로 고집한다고 될 일인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