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늙은 노처녀는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난생처음 꽃가마를 타고 얼굴도 못 본 신랑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동네에서 함께 놀던 동무들은 어느새 하나 둘 다른 마을로 시집가고 아들 셋에 귀하게 얻은 막내딸 오래도록 곁에 두고 싶은 부모님이셨지만 노처녀로 끼고 살 수 없어 좋은 자리를 수소문하여 땅이 좀 있고 돈도 좀 있는 집으로 시집을 보냈다. 남들 다 가는 시집을 노처녀도 가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그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가야 한다니 그저 가야 했다.
“할머니, 할머니는 딸은 없었어?”
“딸이 있었지. 세 살 먹은 게 방실방실 웃는 게 예뻤었는데 하룻저녁 배가 아프다고 방바닥을 구르더니 설사를 몇 번하고 죽어버렸어.”
“왜 병원에 안 갔어?”
“병원이 있어야지 가지.”
“요즘은 딸이 있어야 좋다는데 그 딸이 살아있으면 좋겠다, 그렇지?”
“그럼. 살아있으면 얼마나 좋겠나.”
나는 툭하면 쪼르르 할머니 집으로 달려갔다. 딸 다섯에 아들 하나. 먹이고 입히는 것만으로도 엄마, 아빠는 뙤약볕 아래를 떠날 수 없었다. 나는 할머니 집에 가서 할머니가 끓여주는 된장찌개, 두부조림, 김치부침개를 먹고 마루에 누워서 할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리가 아픈 할머니의 다리를 베고 누워서 학교 이야기도 하고, 할머니의 인생 이야기도 나누었다. 어느 날은 언니와 싸우고 엄마한테 조그만 게 언니한테 대든다고 야단맞고 세상 억울하고 언니보다 더 미운 엄마가 차려주는 밥이 먹기 싫어서 할머니 집에 갔고, 또 어느 날은 피아노학원을 보내달라고 몇 날 며칠을 울어도 소용이 없어서 할머니 집에 갔다.
우리 할머니는 내가 기억하는 한 계속 할머니였다. 우리 할머니는 태어나서 한 번도 머리를 자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미용실에 간 적도 없었다. 우리 할머니는 아침에 일어나면 은비녀를 빼서 긴 머리를 빗고 긴 머리를 돌돌 말아 목뒤에 동그랗게 찐빵모양으로 말아 은비녀를 꽂았다. 우리 할머니의 머리는 검은 머리와 흰머리가 반반 섞여 있었다. 키가 엄마보다 크고 가슴도 엄마보다 크고 말랑말랑했다. 할머니의 살은 하얗고 부드러웠다. 귀가 크고 특히 귓불이 크고 얇았다. 할머니의 눈은 웃는 모양대로 주름이 지어져 있었고, 눈썹은 호랑이 눈썹처럼 긴 게 몇 가닥 섞여있었다. 코는 작지만 오똑했고 입속에는 틀니가 있었다. 볼은 동그랗고 이마에는 주름이 많았다. 손은 크고 살 가죽이 잘 늘어났다. 어렸을 때 문에 찧었다는데 새끼손톱이 하나 없었다.
할머니 손에는 금반지가 3개 있었다. 하나는 꽃무늬가 새겨져 있었고 다른 하나는 쌍가락지였다. 할머니의 다리는 한 번도 해를 본 적이 없는 것처럼 하앴다. 나는 그런 할머니가 좋았다. 할머니는 엄마처럼 어지르기만 하고 치우지도 않는다고 화를 내거나 어쩌다가 저런 인간을 만나서 이렇게 애를 많이 낳고 고생을 하며 산다고 신세 한탄을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늘 조금은 여유롭고 외로워 보였다. 할머니에게는 건사해야 할 자식이 없었다. 다들 장가를 가서 애를 낳고 가정을 이뤘다. 가끔 두 달에 한두 번 큰엄마와 다녀가는 큰아빠, 매일 아침 두부 사 오는 큰아빠, 바로 옆집에 사는 우리 아빠가 있었다. 할머니는 농사지을 땅도 없었다. 자식들에게 다 똑같이 나눠주고 집 마당에 봉숭아며 장미며 팔 수도 없고, 먹지도 못하는 꽃들을 가꾸었다. 할머니에게는 동네 친구 할머니들이 많았다. 할머니들이 먹을 것을 해서 놀러 오기도 하고 할머니가 놀러 가기도 했다. 동네 할머니들은 우리 할머니를 성님이라고 부르며 잘 대접했다.
대체로 착했던 나는 마음에 심통이 불같이 번질 때가 있었다. 나는 옷을 물려 입었고 새 옷을 사 입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동생은 사주고 나는 안 사주면 나는 시기와 질투에 휩싸여 눈물이 났다. 나는 그런 작은 일에 내가 심통이 났다는 것을 티 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엄마, 아빠가 열심히 일한다는 것, 모두에게 새 옷을 사 줄 만큼 돈이 넉넉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았다. 나는 그런 일로 엄마, 아빠를 속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마음이 착해서 그런 일로 심술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을 가족들이 알고 있다고 믿었다. 나는 착하니까 이런 일을 이해해야 했다.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눈물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럴 때면 혼자 있고 싶었다. 할머니집도 가기가 싫었다. 그럴 때 나는 이불장 속에 들어갔다. 좁고 깜깜한 이불장 속에 혼자 들어가서 오롯이 혼자가 되었다. 깜깜하고 좁고 푹신한 이불장에 쪼그리고 누워 내 무릎을 감싸 쥐고 나는 조용히 울었다. 한참 그러고 있어도 아무도 날 찾지 않으면 내가 있으나 없으나 아무도 모른다고 서러워 또 한 번 울었다.
조용히 장롱문을 열고 방문을 열고 살금살금 집을 빠져나와 가는 곳은 스무 발자국만 내딛으면 있는 할머니 집이었다. 할머니 집 마당에는 햇살이 따뜻하게 비추고 마루에는 선풍기를 틀어놓은 할머니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시끌벅적한 우리 집에 비해 할머니 집은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할머니가 깰까 봐 조용히 마루에 걸터앉아 축축한 마음을 햇빛에 말렸다. 햇빛이 내리쬐어 앞산은 초록으로 빛나고 바람이 솔솔 불어 나뭇잎을 살살 흔들고 시원한 마루 그늘에서 할머니는 돌돌 코를 골고 새들은 저마다 지저귀며 울었다. 눈물이 마른 나는 할머니 옆에 나란히 누웠다. 그렇게 마음에 평화가 다시 찾아왔다.
어느 따뜻한 봄날 우리 할머니는 파마를 하기로 결심했다. 이제는 긴 머리 감기도 힘들고 머리카락도 많이 빠지고 염색하기도 힘들다고 했다. 안 그래도 엄마는 긴 머리 싹둑 자르고 파마를 하시라고 몇 번을 말했었다. 동네에는 우리 할머니처럼 비녀를 찌른 할머니가 없었다. 하나 둘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자르고 파마를 해서 다들 똑같은 머리 스타일이 되었다. 나는 우리 할머니가 파마를 하는 게 믿기지 않았다. 태어나서 한 번도 자르지 않은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게 아까운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 비녀 꽂는 게 예쁜데 파마하지 마. 파마하면 시골 아줌마 같아. 촌스러워.”
“할머니가 그럼 시골 할머니지. 이참에 미용실 가서 예쁘게 파마하고 오세요.”
엄마가 내 옆구리를 푹 찌르며 말했다. 할머니는 그렇게 다른 할머니들과 똑같이 아줌마파마를 하고 나타났다. 하지만 우리 할머니는 달랐다. 복슬복슬 파마머리는 너무너무 귀여운 강아지 같았다. 우리 할머니는 아주 귀여운 신식 할머니가 되었다.
두 달에 한 번 할머니는 아리랑 미용실에 파마를 하러 갔다. 아리랑 미용실 아줌마는 할머니들에게 친절하고 할머니들에게는 5000원 깎아줘서 할머니들 사이에 인기가 좋았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나를 데리고 미용실에 가셨다. 파마하는 할머니를 기다리는 것은 지루했다. 나는 미용실 소파에 앉아서 사탕도 먹고 잡지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할머니는 미용실 의자에 앉아서 머리를 말며 졸았다. 긴 기다림 끝에 아줌마파마가 완성되었다. 고불고불한 파마가 1년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할머니는 긴 기다림의 보상으로 나에게 짜장면을 사주셨다. 외식이 거의 없는 우리 집에서 할머니가 사주는 짜장면은 별미 중에 별미였다. 나는 단무지를 야무지게 집어 짜장면에 둘둘 감아 맛있게 짜장면을 먹었다.
할머니는 다리가 아프다, 허리가 아프다 했다. 나는 그 말을 대충 흘려들었다. 그건 진짜 아프다는 소리 같지 않았다. 어떻게 매일 다리가 아프고, 허리가 아플 수가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할머니는 아프다면서도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 집과 할머니집을 오갔다. 그냥 하는 말이겠거니 했다. 할머니는 얼른 죽어야지, 자는 듯이 죽어야지 했다. 나는 그 말도 대충 흘려들었다. 그때까지 죽음은 텔레비전 드라마 속의 이야기였고, 할머니는 내가 태어난 후로 항상 내가 원하면 볼 수 있는 옆집에 있었다. 나에게도 할머니에게도 죽음은 상관없는 말처럼 느껴졌다. 나는 할머니가 왜 자꾸 그런 똑같은 말을 계속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할머니는 죽어야지 하면서도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었고 밥도 맛있게 잘 드셨고 파마도 꼬박꼬박 하러 갔다.
“할머니, 할머니는 몇 살부터 혼자됐어?”
“스물여덟 살이지 아마?”
“스물여덟 살? 큰언니가 스물여덟 살인데? 왜 결혼을 또 안 했어? 아직 젊었잖아.”
“자식이 서이인데 어떻게 시집을 가? 자식 키우고 혼자 살지.”
“할아버지는 어디 간 거야?”
“몰라,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빠는 얼굴도 못 본 아빠의 아빠가 경성고등학교를 나왔다고 자랑스럽게 말했었다. 그때 당시 경성고등학교를 나온 학생들 대다수가 좌익에 빠졌다고 했다. 아빠의 큰 할아버지가 머슴을 해서 종잣돈을 모아서 엿을 팔아 돈을 벌어 땅을 샀고 기차역부터 우리 집까지 내 땅을 밟고 왔을 정도였다고 했다. 그 돈으로 아빠의 아빠는 최고의 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좌익에 빠졌고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고 했다. 그리고 6.25 전쟁이 터지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게 됐다고 했다. 아빠의 아빠는, 그러니까 우리 할머니의 남편은 15살 먹은 꼬마신랑이었다고 했다. 우리 할머니는 스무 살 먹은 노처녀였고, 할아버지는 결혼하고 애들 낳고도 최고의 학교에서 공부를 하느라 방학 때만 잠깐 집에 왔고 그러다 종적을 감추었다.
“할머니, 할머니 6.25 전쟁 때 피난 갔어?”
“그때 네 아빠가 아직 젖먹이인데 업고 피난을 갔다 왔지.”
“전쟁 끝나고는 어땠어?”
“전쟁 끝나고 순사들이 한밤중에 들이닥친 적도 있어. 네 할아버지 왔을까 봐.”
“무서웠겠다. 할아버지 소식은 있었어?”
“없었어.”
깊은 밤이었다. 꿈에서 자꾸 할머니가 내 이름을 불렀다.
“미영아, 미영아!”
눈을 떴다. 아직 방안은 깜깜했다.
“미영아, 미영아!”
꿈인 줄 알았는데 아직 깜깜한 밖에서 할머니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소름이 돋았다. 불을 켜고 엄마, 아빠를 깨웠다.
“엄마,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할머니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마당에 불을 켜고 밖에 가보니 우리 할머니가 마당에 주저앉다시피 쪼그리고 나를 부르고 있었다. 우리는 깜짝 놀라 할머니를 일으켜 세우고 집으로 모시고 들어왔다.
그날 이후로 할머니는 하루에도 수십 번 오가던 우리 집을 못 찾아오셨다. 자꾸 밭으로 가서 길을 헤맸고, 옷은 흙투성이가 됐다. 그러다가 점차 할머니는 다리에 힘이 없어졌고 걸을 수 없게 되고 화장실을 가는 것을 잊어버렸다. 성인용 기저귀를 찼다. 그러다가 할머니는 밥을 먹은 것을 잊어버렸다. 손으로 밥을 뜨지 못했고 반찬을 집지 못했다. 할머니는 숟가락을 입에 대면 입을 벌렸다. 씹을 줄을 몰라 곱게 간 미음과 두유를 드셨다.
“할머니, 할머니 내가 누군 줄 알아?”
“미영이지.”
“할머니, 이 사람은 누구야?”
“윤갱이 엄마지.”
“할머니, 이 사람은 누구야?”
“막냉이지. ”
“할머니, 할머니 이름은 뭐야?”
“최귀순”
할머니는 차츰 엄마도 잊고, 아빠도 잊고, 나도 잊어버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최귀순도 잊어버렸다. 할머니는 말을 잊고 잠을 자고 밥을 먹고 기저귀에 오줌을 누고 똥을 누었다. 할머니의 눈도 예전 같지 않았다. 초점이 없고 우리 할머니 몸속에 더 이상 우리 할머니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할머니의 살결은 여전히 하얗고 말랑말랑했다.
꽃가마를 타고 시집온 우리 할머니는 꽃상여를 타고 산으로 갔다. 꽃상여는 우리 집을 지나 할머니집을 한 바퀴 돌았다. 아빠가 긴 다리를 휘청이며 주저앉아 통곡했다. 그리고 꽃상여는 산으로 갔다. 산속에 찬 땅속에 할머니를 혼자 두고 가면 할머니가 너무 무섭고 외롭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전날 비가 와서 신발에 덕지덕지 흙이 달라붙어 발걸음을 옮기기 힘들었다. 사람들은 호상이라고 했고, 울었고 또 웃었다. 할머니가 죽었는데 어떻게 웃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엄마는 목 놓아 곡을 해야 할머니가 좋은 곳으로 가신다고 온몸으로 통곡했다. 사람들은 관을 땅 속에 묻고 잔디를 입히고 무덤을 계속 밟았다. 곡소리를 하면서 계속 밟았다. 그리고 어른들은 중간중간 돈을 냈다.
봄바람이 살랑거리고 벚꽃이 바람에 흩날리는 계절이 오면 나는 할머니가 생각난다. 할머니가 처음으로 파마를 하고 온 날 그 벚꽃 아래에서 환하게 웃던 모습이 떠오른다. 여전히 엄마와 싸우고 마음 둘 곳 없을 때 할머니의 품이 그립다. 손주와 짜장면을 먹는 할머니를 보면 우리 할머니가 떠오른다. 평상에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아줌마파마를 한 하얀 머리 할머니들을 보면 우리 할머니가 눈물 나게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