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이 걸렸다
애인과 함께 하는 여행이 익숙했고, 같이 가지 않으면 그 사람이 많이 생각이 났다. 서로에게 스며 들었고 곧 축축해졌다. 함께 해서 좋은 여행이었는데 함께 해서 좋지가 않았다. 마음 한편이 텅 빈 느낌이었다. 여행 내내 그랬다. 프랑스를, 이탈리아를 누빌 때에도 그랬다. 애인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으리라. 오랫동안 느껴왔던 나 자신에 대한 권태로움이 근본적인 시발점이었다고 오늘에서야 정리를 했다. 1년 만이다. 1년이 걸렸다. 그동안 왜 같이 하면서도 그 여행이 풍족하고, 예전처럼 익사이팅하지 않다고 느꼈는지 이유가 정리된다. 그래서 종종 이런 말을 했다. '나 순례길 걷고 싶어. 근데 너랑 다른 루트로 가고 싶어. 우리 서로의 끝 지점에서 시작해 교차점에서 만나는 건 어떨까?' 혼자 있고 싶어 근데 너랑도 같이 가고 싶어. 뭔 욕심스러운 발상인가. 혼자서 떠나고 싶다 했으면서 익숙함이 주는 안정감은 또 놓치고 싶지 않다는 알량함이다.
요새의 나는 5년 전의 나의 명랑함을 되찾은 것 같다. 마음 챙김을 중요시했던 그때의 내가 업그레이드되고 단단함으로 중무장해서 돌아온 것이다. 그때에 알 수 없어 불안했던 나의 앞길을 대처하는 법을 이제는 안다. 사실 묘책이라는 것도 정도라는 것도 없는 문제이긴 하다. 이 문제는 삶 자체이다. 이 생을 살아가는 내내 끊임없이 고민하고 안고 가야 할 주제라는 것이다. 문제라고 하면 부정적으로 들릴 수도 있으니 그렇게 칭하지 말아야겠다. 묘책이나 정도는 없지만 나의 해결책은 '태도'다. 그 불안과 고민을 대하는 태도. 의연해졌다고 할까.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5년 전보다 속이 꽉 차고 튼튼해진 느낌이다. 33살에 깨달은 나. 알았으니까 이제 앞으로 잊지 않고 나를 위한 삶을, 사랑을 주는 삶을, 주위를 헤아리고, 환경을 사랑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한다.
애인에게 혼자서 순례길을 걷고 싶다고 했을 때 (상대는 간다고 하지도 않았는데) 어쩌면 나는 그에게 거의 정서적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게 헤어짐이라고 할지라도. (결국 그렇게 되었지만) 당시에 헤어짐이란 저 속 깊숙이 발가락 끝에 넣어두고 (두려워서) 꺼내지 않았지만 자신에게 흥미를 잃어버린 나에겐 어쩜 그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한 달간 알고 지낸 사람이 있다. 첫 만남에 호감을 느꼈고, 두 번째 만남에 관심도가 떨어졌고, 세 번째엔 호감도 떨어졌다. 이 마음을 얼른 전해야 하는데 이리저리 조언을 구했다. 나는 돌직구로 이야기하는 것이 솔직하고 최선이라 생각했는데 알아보니 상대가 최대한 상처받지 않는 법을 찾아야 한다고 한다. 한 달 동안 고작 3번 만난 사람을 거절하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데, 4년을 넘게 만나오며 육체적, 정신적 교감과 수많은 추억이 있는 나와의 이별을 고해야 했던 그의 고충이 얼마나 어려웠을까 처음으로 생각이 났다.
프랑스와 시칠리아를 혼자서 떠났다면 다른 여행이 되었을까. 되었겠지. 고독하든, 구질했든 더 풍요로웠을 거라 여행을 가지 못하는 시점에서 생각해본다. 김영하 작가의 시칠리아 여행 산문, <오래 준비해온 대답>을 동네 서점에서 구해간다. 그리고 다음번 언젠가 있을 나의 홀로 여행을 상상하고 지난 여행을 추억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