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술술 이빨을 털고 있는 나를 발견
머리가 너무 지저분하고 숱이 차올라 감당이 되지 않을 지경에 다다랐다. 일하러 갈 농장에 가기 전에 머리를 꼭 다듬으리라 벼르고 있었는데 마침 뉴질랜드 남섬의 최대 도시인 크라이스트처치에 가게 됐다. Riccarton의 중국 슈퍼에서 장을 보고 주변의 미용실을 찾아보니 마침 반갑게 한국 미용실이 있다. 후기도 괜찮고 벌써부터 무언가 모를 친근함이 느껴졌다. 이내 곧 한국인과 대화를 할 생각에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한국인과의 대화라.. 대체 얼마만인가? 가끔씩 집에, 친한 친구와 전화를 하는 것 빼고, 생강에게 알아듣지도 못하는걸 뻔히 알면서도 마구 질러대는 한국말 빼고는 사람을 마주하고 직접 이야기를 한 적은 없다. 사실 뭐 아무것도 아닌 머리 자르러 가는 길이지만 나에게는 이미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된 것이다. 생전 만나본 적도 없는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설렐 줄이야. 상대방은 이야기할 생각도 없는데 나 혼자 김칫국 마시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은 글을 적는 지금으로써는 드는 생각이어도 당시에는 설렘으로 가득 찬 마음뿐이었다.
“머리 자르러 왔어요.”
“집이 어디예요?”
“아 경기도 고양시예요”
“아, 뉴질랜드에서는 어디서 지내요?”
“크라이스트처치는 그냥 지나가는 길이고요. 다음 주부터 저기 넬슨 근처에 골든베이에 있는 목장에서 일하게 됐어요.”
“아 그렇구나. 한국 집이 고양시라고요? 아마 10년도 더 되었지. 내가 고양에 있는 미용실에 다닌 적이 있어요. 그 자유로 타고 가는 버스 타고 출근했었는데..”
“어머 정말요? 혹시 921번 버스 아닌가요?”
“어어 맞아요 맞아 921. 좌석버스 맞죠?”
“네 맞아요!”
"제 동생도 미용일 하거든요. 이제 작년에 선생님 달았는데 엄청 힘들어하더라고요."
뉴질랜드에서 한국사람을 처음 만나 한국말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순간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한국어의 부재를 증명이라도 해 보이듯이 신이 나서 떠들기 시작했다. 나이를 조금씩 먹고 뻔뻔함이 늘어서 대화 실력이 늘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어보지도 않은 이야기도 절로 늘어놓으며, 상대방에 질문도 해가며. 이렇게 낯선이 와 대화를 한다는 건 생각도 못했던 일인데. 처음 만나는 사람과의 조그만 공감대를 형성하며 일회성일지도 모르는 만남의 깊이를 최대한 파고 있었다.
“원장님은 한국 고향이 어디세요?
“저기 전라도에 강진이라고 알아요?”
“흠.. 죄송해요 잘 모르겠어요.”
“그럼 해남은 아나?”
“네! 해남은 가본 적은 없지만 들어봤어요.”
“거기 근처예요.”
“아~ 대신에 저는 전라도 순천, 벌교.. 아 여수까지는 가봤어요.”
“여수 좋지~”
“전라도는 밥이 너무 맛있어서 너무 좋았어요. 김치 맛이 정말 첫 입부터 다르더라고요.”
“아무 데나 들어가도 맛있어요.”
“맞아요 정말 그랬어요.”
“머리 감기 힘들겠다~ 감고 말리고 하려면.”
“네 맞아요.. 그래서 정기적으로 머리를 솎아줘야 해요”
“한국이랑 뉴질랜드랑 지내는 게 어디가 너 괜찮으세요?”
“여기가 그래도 더 괜찮아요 지내기 공기도 그렇고 살다 보니까 익숙해져서.. 있을 것 다 있고. 우리 애 지내기에도 좋고. 한국엔 잠깐 가족들 만나러 가고 여행으로 가는 게 좋지 다시 가서 살고 싶지는 않아요”
“그러게 여기는 한국인도 그렇고 아시아 사람들도 커뮤니티가 각각 있어서 살기 좋을 것 같아요. 공기는 말할 것도 없고요. 여기 오신지는 얼마나 됐는데요?”
“3년 됐어요.”
“따님분이 학교 다니기에 너무 좋겠어요.”
키위 아이들이 학교에서 얼마나 야외활동을 많이 하고 활동적인지를 알고 있기에 진심으로 부러움에서 묻어 나온 말이었다.
“아이 말도 마요. 내가 너무 부럽다니깐. 나는 정말 학교 다닐 때 그런 거 상상도 못 해보고 자라서 딸내미가 너무 부러워요.”
“이해해요. 저도 부럽더라고요. 전에 어느 공원에서 학교 철인 3종 경기하는 걸 봤는데 애들이 다들 얼마나 잘 뛰고 수영도 잘하고 자전거도 잘 타던지 정말 건강해 보이더라고요. 저도 그런 교육은 못 받아봐서 있어봤자 일주일에 두세 시간 있는 체육시간이죠. 진짜 체력을 높이고 아이들 행복에 가치를 두는 뉴질랜드 교육 시스템이 참 부러웠어요.”
“와, 애들이 정말 어른만치 한다니까요. 어른보다 더 잘해”
이야기에 이야기를 물고 이어가다 보니 어느새 나의 머리는 마무리가 되어가고 있었다. 대충 솎아주셔도 될 것을 성심성의껏 정성스레 다듬어주신 머리는 한결 가볍고 상쾌했다. 리카튼의 미용실 원장님은 또 한 명의 한국인과 몇 마디 주고받아 주신 것이겠지만 나에게는 오랜 해외생활에서 온 한국어 부재의 갈증을 풀어준, 문화적 부재를 채워준 정말 소중한 시간이었다. 단순히 비용을 지불하고 머리를 자르러 온 것이었지만 오히려 내가 얻어가는 것이 많은 따뜻한 경험이었다.
10년 세계 여행에서 만난 이야기를 나눕니다.
현재는 캠퍼밴에서 살며 뉴질랜드를 누비고 있어요.
블로그 : http://nanahana.blog.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