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때도 경험해보지 못한 인기다. 아기띠를 하고 집앞 빵집이나 은행에 들르면 그곳에 있던 할머니들의 구애가 이어진다. 주름진 그녀들은 멀뚱거리는 아기를 향해서 웃고 어르고 노래하고 까꿍거린다. 오직 아기를 한 번 웃겨보겠다고. 그 모습에 내가 사랑에 빠져 헤실헤실 웃게 된다.
"모유만 먹고 이렇게 잘 큰 거야. 세상에. 대단하지?" 며칠 전 집 앞 빵집에서 만난 한 할머니는 아기를 안고 있는 날 보더니 대뜸 스마트폰을 들이밀었다. 액정 속에는 통통하고 뽀얀 아기가 빛나게 웃고 있다.
"손주예요? 아고. 눈빛이 진짜 똘똘하네요." 몇 번의 경험으로 나는 그녀가 제일 흡족해 할 법한 리액션을 해낸다.
그런데 그녀는 순식간에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는다. "우리 조카네 아들이야. 나는 손주 없어..." 나는 곧 그녀의 아들이 40대 미혼이고 그녀는 그것이 못내 아쉽다는 것까지 듣게 된다. 요즘 혼자 즐겁게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냐고 해봤자 소용 없다. 아들을 닮은 손주를 안아보고픈 그녀는 조카 손주 사진을 받아보며 그 마음을 풀어내고 있다고 하소연을 한다.
바야흐로 손주공유의 시대다. 저출생 시대. 할머니, 할아버지 한 사람이 여러 손주를 거느리던 시절은 끝났다. 이제 아기 한 명이 여러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기쁨이 돼줘야 한다.
얼마 전 친척 결혼식에서 애기는 온갖 어른들의 품에 안겨 옮겨다니느라 쉴 틈이 없었다. 아들이 비혼주의인 우리 이모, 자식 둘이 아직 결혼 전인 삼촌... (아직?) 손주 없는 그들은 오랜만의 아기가 반갑다며 아기를 안고 결혼식장을 누볐다. 여러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웃어주느라 지친 아기는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저녁 6시부터 곯아 떨어졌다. 야호. 역시 싸움은 쪽수가 많아야 하는 법이다.
아기가 가져온 수많은 행복 중 한 가지는 엄마아빠의 기쁜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다 늙어버린 그들이 바보 같은 얼굴로 허허실실 웃는 걸 원없이 본다. 우리 딸도 어렸을 때 저랬지, 우리 딸은 안 그랬는데, 지나간 세월을 곱씹으며 즐거워할 때 그들의 얼굴에는 당신들의 젊음이 그저 사라진 건 아니라는 자긍심이 피어오른다. 자신의 생애를 들여 완성한 작품을 들여다보는 작가의 얼굴. 나는 그걸 보고 있는 게 덩달아 자랑스럽다.
이번 추석에는 아기가 어리다는 핑계로 시집에 가는 대신 아기와 함께 친정에 왔다. (이게 왜 핑계씩이나 필요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세상에나, 아기침대에 누운 손녀 앞에서 DJ DOC의 'DOC와 춤을"을 부르며 춤을 췄다. 남들 앞에서 노래도 춤도 부르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그녀인데. "할아버지 할머니도 춤을 춰요"에 이어 "이히"까지 빼놓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러자 아기도 헝헝헝 하고 소리내 웃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춤을 추게 만드는, 작은 인간을 우리 함께 사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