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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석 Dec 15. 2020

트라이얼 오브 더 시카고 7

짧은 리뷰 

스포일러 있음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반전운동 활동가들의 재판을 다룬 영화다. 시카고에서 민주당 전당대회가 열리고, 평화활동가들은 민주당 전당대회에 맞춰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를 기획한다. 다양한 정치그룹들이 모여서 베트남전 반대 시위를 하지만 의도하지 않았던 폭력 사태가 발생한다. 새롭게 정권을 잡은 닉슨 정부는 반전운동을 약화시키기 위해 시카고 데모 각 그룹의 지도자격인 7명과 블랙팬서당 1명을 기소해서 무리하고 편파적인 재판을 진행한다. 7명의 재판 과정이 영화의 주된 줄거리다. 법정 드라마 특유의 긴장감 있는 전개에 더해, 재판을 받는 평화활동가들의 각기 다른 정치적 성향이 빚어내는 갈등 상황 덕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다. 마지막에는 약간 작위적인 해피엔딩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장점이 단점보다 많은 영화였다. 특별히 기억 남는 것들을 기록하려고 리뷰를 남긴다. 아무래도 내가 평화활동가라서, 자연스럽게 직업인의 시선으로 영화를 본 거 같다. 




미국의 반전운동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반전 운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한다. 아주 광범위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이 일어났다는 정도만 안다. 그나마 전쟁없는세상 활동과 연결되어 나름 공부를 했던 사례들 - 베리건 신부 형제가 주축이 되어 징병사무소를 습격해 징병서류를 가지고 나와 불태워 버린 직접행동, 세계챔피언 무하마드 알리의 양심적 병역거부 등에 대해서만 조금 알 뿐이다. 


하워드 진의 책이나 당시 미국 평화운동 관련 글을 읽어보면 확실히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의 평화운동은 아주 광범위하고 대중적이었다. 아마 박근혜 전 대통령 퇴진 집회 같은 느낌이지 않았을까 추측해본다. 그랬던 만큼 다양한 운동 그룹이 따로 또 같이 활동을 이어갔고 내부 갈등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원칙도 다르고 목표도 다르고 방법론도 각기 달랐을 테니, 내부 갈등으로 발산하는 에너지의 크기나 전쟁을 멈추고자 하는 열망만큼이나 크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영화에서 미국의 반전운동이 아주 자세하게 다뤄지지는 않는다. 다만 재판을 받는 7명은 각기 다른 그룹에서 왔고 그 때문에 일어나는 갈등이 영화의 주된 줄거리인 바, 당시 대중적이었던 반전운동의 일반적인 분위기를 유추해볼 수 있을 뿐이다. 베트남전 반대 운동 하면 쉽게 떠오르는 이미지인 히피 그룹, 히피 그룹의 대책 없고 매사에 장난스러운 모습을 못마땅해하는 학생운동, 가장 철저하게 비폭력 원칙을 고수하는 (아마도) 시민운동 그룹이 핵심적인 세력으로 그려진다. 특히 히피 그룹과 학생운동 그룹은 비주얼에서부터 투쟁에 임하는 방식과 태도, 재판 전략까지 모든 면에서 사사건건 부딪힌다. 편파적이고 위법적으로 재판을 진행하는 판사를 조롱하는 히피들과, 이런 히피들의 행동에 대해 "너희는 그저 싸우는 게 즐거울 뿐 혁명은 관심 없잖아"라고 외치는 매사에 진지한 학생운동가들의 갈등은 물론 그이들 사이의 갈등의 복잡한 단면을 보여주지는 못했겠지만 운동 내부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이유와 양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비폭력 투쟁과 재판 


영화 시작 장면은 민주당 전당대회장에서 베트남 전쟁 반대 시위를 하기 위해 시카고로 모이는 각 그룹 지도자들의 모습이다. 이들은 약간의 온도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시위가 이뤄져야 한다는 데 이견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폭력 사태로 시위는 막을 내린다. 


재판의 가장 큰 쟁점은 폭력 사태의 책임이 경찰에게 있는지, 시위대에게 있는지다. 검찰은 폭력 사태를 시위의 지도부가 기획했거나 최소한 선동했다고 주장하고, 변호인은 시위의 지도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비폭력 원칙을 고수하였고 경찰이 폭력 사태를 일으켰다고 주장한다. 물론 판사는 온갖 비열한 술수를 동원해 피고인들에게 불리하게 재판을 진행해 간다. 


나는 자연스럽게 한국의 평화활동가들의 재판을 떠올렸다. 물론 우리는 배심원들이 있는 재판이 아니고, 재판정에서 피고인들이 말할 기회가 많지 않고 서류 중심으로 재판이 이뤄지지만, 직접행동을 하는 활동가들에게 재판은 그리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다. 요새는 한국에서도 폭력 투쟁이 거의 없지만(물론 폭력 사태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고, 거의 대부분은 시위대가 아니라 경찰이 일으킨다) 전쟁없는세상이 처음 탄생한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시위나 직접행동은 폭력 투쟁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는 비폭력 투쟁이 더 민주적이고 목표 달성에도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 철저하게 기획하고 준비한 비폭력 투쟁은 참가자들을 능동적으로 만들고 자부심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특히 재판에서 그 빛을 발했다. 우리는 재판에서 형량을 줄이기 위해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었고 덕분에 떳떳하고 당당했다. 또한 우리의 비폭력은 경찰의 폭력을 드러내는 데 효과적이었다. 



 병역거부자와 비폭력, 그리고 양심 


시카고의 운동 그룹 지도자들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비폭력의 원칙을 주장하는 이가 있었는데, 2차세계대전 당시 병역거부자였다. 영화 <헥소고지>에서는 주인공이 병역거부자지만 평화운동을 하는 병역거부자는 아니다. 모든 전쟁 행위에 동참하는 것을 거부하는 평화활동가 병역거부자를 영화에서 처음 보는 거라 무척 반가웠다. 그런데 1960년대 미국사회에서도 나치와 싸운 제2차세계대전 당시 병역거부자는 인기가 없었던 거 같다. 재판의 어느 국면에서 중요한 증언을 배심원 앞에서 해야 하는데 이 병역거부자가 지원하자 변호사가 배심원들이 싫어할 거라고 제지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실 장면보다도 인상 깊게 남은 것은 재판이 마지막으로 달려갈 때, 판사가 피고인을 도발할 때, 병역거부자의 행동이었다. 자기 아들에게도 폭력은 어떤 상황에서도 정당화될 없다고 강조하던 남자가, 결국 판사의 도발에 넘어가 자신을 제지하는 법원 경위의 얼굴에 주먹을 휘두른다. 대, 얼굴을 가격하고 스스로도 놀라며 얼굴이 일그러진다. 뭐라 자책할 새도 없이 다른 경위들이 달려들어 바닥에 눕히고 손을 뒤로 가져가 묶는다. 바닥에 얼굴을 대고 있는 남자의 눈에는 자신의 폭력을 보고 놀라는 아들의 얼굴이 보인다. 남자는 끌려가면서도 자신에 맞은 경위에게 거듭 사과한다. 


한국에서 대체복무 심사를 받는 병역거부자들, 재판을 받는 병역거부자들이 마주하는 질문들이 떠올랐다. 일생에 단 한순간도 비폭력 평화주의자로서 양심에 어긋남이 없어야지만 병역거부자인 것을 인정할 수 있다는 자세로 재판을 이어가는 한국의 검사들이 떠올랐다. 영화의 병역거부자 아저씨는 아마도 주먹질 한 번으로 병역거부 심사에서 떨어지겠지. 


그런데 나는 그 주먹질이 바로 양심의 실체를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평화주의자의 양심이 주먹이라는 게 아니다. 양심이라는 게 절대로 어겨질 수 없는 그런 고귀한 것이 아니라, 어떤 행동이 자신의 양심에 어긋났을 때 비로소 발현되면 스스로를 부끄러워하게 만드는 마음의 소리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평화주의자든 누구든 살아가면서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다. 다양한 이유로 한다. 영화에서 비폭력의 양심을 가진 병역거부자가 법원 경위에게 폭력(주먹 한 대)을 행사한 것처럼. 양심이 있다는 것은 100% 그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한다는 의미이기보다는,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부끄러워할 줄 안다는 의미에 가깝다. 경위를 때린 뒤 바로 스스로 자책하고 경위에게 거듭 사과하는 병역거부자의 행동이 그의 양심을 증명한다. 그의 주먹질이 폭력이고 그 잘못에 대한 책임은 따로 져야겠지만, 그 하나의 행동이 그가 비폭력주의자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건 아니라는 말이다. 병역거부자의 양심을 논할 때, 다른 모든 이의 양심을 논할 때와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을 마주하고선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헌법에 보장된 양심의 자유는, 인간에게 자연스럽게 내재되어 있는 인격을 설명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부족해서 양심을 배반할 가능성을 지니고 살아가는 인간이기 때문에 법으로서 사람들이 양심의 자유를 지킬 있게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의 주먹질은 결코 잘한 일이 아니지만 병역거부자도 분노하고, 실수하고, 후회하고, 반성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자신의 폭력에 대해 바로 뉘우치고, 사과하고,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그는 아주 (인간의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모두 가진) 인간적인 병역거부자였다고 회상하며 영화에 대한 기록을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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